컨텐츠 바로가기

04.23 (화)

소송 일찍 냈다고… 긴급조치9호 배상 길 열렸지만 웃지 못하는 193명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대학생 시위 주도했다며 현상금에 지인들까지 고문
구제 길 잃은 패소 확정자들…특별법 제정 외 길 없어
한국일보

'긴급조치9호' 피해자 김준묵 한국포인트거래소 회장(전 스포츠서울 회장)이 지난달 28일 서울 여의도 인근에서 한국일보와 만나 당시 국가폭력에 대해 말하고 있다. 문재연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스포츠서울 회장을 지낸 김준묵씨는 44년 전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유신헌법에 기초한 긴급조치 9호 탓에 수많은 시민들이 고통을 받았다.

김씨는 유신헌법을 비판하고 긴급조치에 반발하는 학생들과 전국적 시위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전국 대학생 시위를 계획했던 그는 쫓기는 신세로 살아야 했고, 순경 월급이 13만 원이던 시절 경찰은 '현상금 100만 원과 1계급 특진'을 걸고 그를 추적하기도 했다.

'피해는 있지만 책임질 주체는 없다'는 대법원 판결에 구제 길 잃은 피해자들


김씨는 오랜 시간 다발성 말초신경염 약을 복용 중이다. 쫓기다가 결국 경찰에 잡혀 고문까지 당하고 징역살이를 하면서 얻은 병 때문이다. 그는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몸은 그때의 고통과 아픔을 계속 되새김질했다.

그에게 국가배상은 '국가폭력에 대한 정부의 실질적 반성'으로 여겨졌다. 형사보상금으로 1억 원을 받아 전액을 기부한 그는 국가배상금 역시 동고동락했던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등과 함께 설립한 '아시아 민주주의와 인권기금'에 기부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김씨의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2016년 6월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최종 패소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발동은 '고도의 통치행위'라는 법원 판단 탓에, 피해자는 있지만 책임질 주체는 없는 모순된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한국일보

'긴급조치9호' 피해자 김준묵 한국포인트거래소 회장(전 스포츠서울 회장)이 지난달 28일 서울 여의도 인근에서 한국일보와 만나 당시 국가폭력에 대해 말하고 있다. 문재연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김씨는 지난 8월 30일 대법원 판결에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판례를 변경하면서 긴급조치 9호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했지만, 김씨처럼 이미 패소 확정 판결을 받은 이들에겐 적용되지 않았다. "저는 그래도 나은 편이에요. 하지만 '막걸리 긴급조치(말 한마디에 처벌받는다는 은어)' 피해자들은 생계가 무너지고 폐인이 됐어요. 이들을 위한 구제 조치는 있어야 하지 않나요?"

특별법 제정 외 구제 길 막혀…'긴급조치 9호' 패소 확정자 193명

한국일보

대법원 청사.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법조계에선 긴급조치 9호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두고 '환영하지만 조금은 미흡한 결론'이라고 평가한다. 김씨처럼 일찍 소송을 냈다가 패소가 확정된 피해자와 아직 소송을 내지 않았거나 진행 중인 사람 사이에 형평성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긴급조치 피해자를 변호해온 서중희 법무법인 혜인 변호사는 "일찍 소송을 냈다는 이유만으로 구제를 받지 못하게 된 피해자들을 생각하면, 재판을 독려했던 게 후회되기도 한다"며 "패소 확정자들은 더 많은 상처를 안게 됐다. 구제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특별법 제정을 제언한다. 2020년 '유신헌법 긴급조치로 인한 피해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에 발의됐지만 현재까지 소관 상임위원회에 상정도 안 되고 있다. 법원 판례가 바뀐 이상, 국회도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6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따르면, 긴급조치 9호 위반사건으로 총 974명(544건)이 재판에 넘겨졌다. 이 가운데 국가배상 소송을 낸 피해자는 422명으로, 이 중 193명은 패소를 확정받았다. 이들은 김씨처럼 남보다 일찍 소송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배상 길이 막혀 버렸다.
한국일보

그래픽=박구원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문재연 기자 munjae@hankookilbo.com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