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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추신수 따라온 꼬마 전설됐다…이대호 '10번' 사직구장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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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G와의 인천 은퇴 투어 경기에서 역전 결승홈런을 때려내고 베이스를 도는 이대호.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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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 이대호(40)가 현역 생활의 마지막 경기를 준비하고 있다. 그는 오는 8일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열리는 LG 트윈스와의 시즌 최종전을 끝으로 22년에 걸친 프로 선수 생활을 마감한다. 지난 7월 28일 KBO 올스타전을 시작으로 후반기 내내 이어진 은퇴 투어에 묵직한 마침표를 찍는다.

이대호는 한국인 타자 최초로 한국·미국·일본 프로야구 1군 리그를 모두 경험한 기념비적인 선수다. 해외에서 5년을 뛰었지만, KBO리그에서는 오직 롯데 유니폼만 입었다. 롯데는 이대호의 등번호 10번을 이미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고(故) 최동원에 이은 롯데 구단 역대 두 번째 영예다.

이대호는 부산 수영초등학교 시절 야구를 시작했다. 야구부 입단을 위해 전학 온 추신수(SSG 랜더스)가 덩치 큰 같은 반 친구에게 "나랑 같이 야구하자"고 제안한 게 그 시작이었다. 꼬마 이대호는 얼떨결에 야구부에 따라갔다가 그대로 눌러 앉았다. 그 후 이대호는 경남고 에이스, 추신수는 부산고 에이스로 활약하며 전국 고교야구를 주름잡았다.

이대호는 2001년 고향팀 롯데에 2차 1라운드(전체 4순위)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 처음엔 투수로 뽑혔지만, 1년 만에 타자로 전향했다. 프로 첫 스프링캠프 때 '빨리 뭔가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에 무리하다 어깨를 다친 탓이다. 부상 여파로 직구 구속이 시속 140㎞ 밑으로 떨어졌고, 주특기였던 포크볼도 힘을 잃었다. 결국 투수를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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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KBO 올스타전에서 열린 KBO리그 40주년 기념 행사에서 고 최동원의 아들 최기호씨(왼쪽)에게 꽃다발을 건네며 포옹하는 이대호.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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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서러움도 많이 겪었다. 프로 지도자들은 체중이 120㎏에 육박하던 거구의 내야수에게 늘 "살을 빼라"고 압박했다. 체중 감량을 위해 과도한 훈련을 하다 무릎에 문제가 생겨 수술까지 받았다. 다행히 이대호는 유연성도, 회복력도 남다른 '천재형' 선수였다. 2004년 이대호가 홈런 20개를 때려내며 서서히 궤도에 오르자 체중을 둘러싼 걱정은 빠르게 잦아들었다. 메이저리그(MLB)에서 온 제리 로이스터 전 롯데 감독은 "저 정도 체격의 선수가 3루수를 맡는 건 MLB에서도 본 적이 없다. 운동능력이 대단하다"고 감탄했을 정도다.

미완의 대기는 2006년 결국 꽃을 피웠다. 그해 이대호는 1984년의 이만수 이후 22년 만에 처음으로 타자 트리플 크라운(타율·타점·홈런 1위)을 달성했다. 투수 트리플 크라운(승리·평균자책점·탈삼진 1위)을 달성한 '괴물 신인' 류현진(당시 한화 이글스·현 토론토 블루제이스)이 없었다면,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도 가능했던 성적이다. 이대호는 2007년에도 도루를 제외한 타격 전 부문 상위권에 오르면서 명실상부한 리그 최고 타자 중 한 명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2008년엔 또 하나의 꿈도 이뤘다. 데뷔 후 처음으로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았다. 온 부산이 하나가 돼 야구 열기로 들썩였다. 상대 팀 감독들은 "이대호는 늘 우리 투수들에게 위압감을 주는 존재"라고 감탄했다. 롯데 타자들은 "이대호가 우리 타선에 있었기에 늘 부담 없이 타석에 설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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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타격 7관왕에 올라 정규시즌 MVP를 수상한 뒤 소감을 말하는 이대호.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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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호는 2010년 선수 생활의 하이라이트를 맞았다. 도루를 제외한 타격 전 부문(타율·타점·홈런·득점·안타·출루율·장타율) 타이틀을 석권하면서 타격 7관왕을 달성했다. KBO리그 역사에 전무후무한 발자취다. 1점 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류현진도 이번만큼은 이대호에게 MVP 왕관을 내줘야 했다.

이대호는 또 그해 8월 4일 잠실 두산 베어스전부터 14일 광주 KIA 타이거즈전까지 9경기 연속 홈런을 쳐 이 부문 세계기록도 세웠다. 역사가 150년에 육박하는 MLB에서도 아직 나오지 않은 기록이다. 외신들도 이 기록에 주목할 만큼 큰 화제를 모았다. 롯데는 이대호에게 순금 30냥으로 제작된 1㎏짜리 황금 배트를 선물했다.

이대호는 승부욕이 대단한 선수로도 유명했다. 2010년 두산과의 준플레이오프 2차전이 그 백미였다. 1-1로 팽팽하게 맞선 연장 10회 말, 롯데는 1사 2루 득점 기회를 맞았다. 그러자 두산은 이날 2안타를 친 조성환을 고의4구로 내보내 1루를 채웠다. 당시 발목 상태가 좋지 않았던 이대호가 이날 4타석에서 안타 없이 물러났던 점을 의식해서다. 대기 타석에 있던 이대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앞 타자 고의4구'라는 생경한 풍경을 지켜봤다. 그리고 이어진 1사 1·2루에서 좌월 끝내기 3점 홈런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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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경기 연속 홈런 세계 기록을 세운 뒤 기념행사에서 트로피를 받고 기념 촬영하는 이대호(오른쪽).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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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호는 '한국 최고'에 만족하지도 않았다. 자유계약선수(FA)가 된 2012년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해 오릭스 버펄로스,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4번 타자로 활약했다. 특히 소프트뱅크 시절이던 2015년엔 일본시리즈 MVP에 오르면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한국보다 한 수 위 리그인 일본에서 무척 성공적인 4년을 보냈다.

그럼에도 그는 소프트뱅크의 재계약 제안을 뿌리치고 2016년 시애틀 매리너스와 1년 400만 달러에 스플릿 계약(MLB 소속일 때와 마이너리그 소속일 때의 연봉이 다른 계약)을 했다. MLB 진입도 보장 받지 못한 채, 스프링캠프에 초청선수로 참가해 처음부터 다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그 결과 이대호는 MLB 무대를 밟겠다는 목표를 현실로 만들었다. 동시에 한·미·일 프로야구에서 모두 두 자릿수 홈런을 때려낸 유일한 타자가 됐다.

이대호는 국가대표로도 최고의 활약을 했다. 2006 도하 아시안게임, 2008 베이징 올림픽, 2009 월드베이스볼클래식, 2015 프리미어12 등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중심타자 역할을 해냈다. 국제대회 41경기에서 통산 타율 0.323(133타수 43안타), 홈런 7개, 41타점을 기록했다. 100타석 이상 출전한 선수 중 타점 1위, 홈런 2위, OPS(출루율+장타율) 1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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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국가대표 중심 타자로 맹활약한 이대호.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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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는 2017년 KBO리그로 복귀한 이대호와 4년 총액 150억원에 상징적인 FA 계약을 했다. 엄청난 액수지만, 이대호에게는 큰 결단이기도 했다. 그는 2014년과 2015년 소프트뱅크에서 합계 12억5000만엔을 받았다. 롯데와의 4년 계약 총액과 큰 차이가 없다. 시애틀과의 계약이 끝난 뒤 일본 구단들은 롯데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제시하면서 이대호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그러나 이대호는 이 모든 제안을 뿌리치고 롯데로 왔다. "일본과 미국에서 모두 뛰겠다는 꿈은 이뤘다. 이제 롯데로 돌아와 팀 동료, 후배들과 함께 우승을 하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고 했다.

결국 그 희망은 이루지 못한 채 마지막이 왔다. 이대호는 롯데와의 계약 종료를 앞둔 올 시즌 개막 전 "1년만 더 뛰고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KBO는 "그동안 이대호가 국내 리그와 국제대회에서 활약했던 공로를 인정한다"며 이승엽(2017년)에 이은 역대 두 번째 은퇴 투어 주자로 선정했다. 지난 7월 28일 서울 잠실구장(두산)에서 시작된 구장별 은퇴 투어는 광주 기아챔피언스필드-창원 NC파크-인천 SSG랜더스필드-서울 고척스카이돔-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수원 케이티위즈파크-대전 한화생명이글스파크를 거쳐 지난달 22일 다시 잠실구장(LG)에서 끝났다.

이대호는 이 기간을 단순한 '작별 인사'로 여기지 않았다. 통산 3호 대타 홈런, 역전 결승 홈런, 오른손 타자 최초의 통산 1400타점, 통산 12호 만루홈런 등 기념비적인 장면이 모두 은퇴 투어 경기에서 나왔다. 여전히 강력한 '롯데의 중심 타자'로서 변함없이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존재감을 뽐냈다.

실제로 올 시즌 단 한 경기만 남겨둔 그의 성적은 타율 0.332(536타수 178안타), 홈런 23개, 100타점, OPS 0.882다. 5일까지 타율·홈런·타점 모두 5위 안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은퇴 시즌에 100타점 고지를 밟은 타자는 이대호가 처음이다. "한국시리즈 무대에 서고 싶다"던 염원 하나만 빼면, 프로 선수로서 거의 모든 걸 다 이루고 그라운드를 떠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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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호(왼쪽)에게 은퇴 기념 액자를 선물하는 선물하는 추신수. 사진 SSG 랜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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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호를 야구의 길로 이끌었던 추신수는 "어린 시절 이대호라는 라이벌이 없었다면, MLB 진출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경쟁자가 있어 참 행복했다"며 "박수를 받고 떠나는 친구가 참 부럽고 대단하다"고 했다. 롯데 시절 이대호의 전성기를 함께했던 포수 강민호(삼성 라이온즈)도 "형에게 어릴 때 참 많은 걸 배우면서 야구를 했던 것 같다. 참 많이 의지했던 선배였다"며 "은퇴한다니까 아쉽기도 하지만, 정말 멋지게 박수 받으며 떠나는 것 같아서 후배로서 기분이 참 좋다"고 했다.

8일 밤, 부산 사직구장 외야에는 최동원의 등번호 '11' 옆에 이대호의 등번호 '10'이 나란히 걸린다. 20세기의 롯데와 21세기의 롯데를 지탱했던 투타의 두 기둥이 마침내 '합체'하는 순간이다. 아마도 부산은 오랫동안 이대호의 빈자리를 그리워할 듯하다.

배영은 기자 bae.younge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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