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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 볼!] 20년 한을 풀었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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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하고 샴페인 파티를 벌이는 매리너스 선수들. / 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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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30일(현지 시각) 미국 시애틀 T-모바일 파크. 시애틀 매리너스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메이저리그(MLB) 경기는 1-1로 팽팽히 맞선 채 9회말로 접어들었습니다.

여차하면 연장으로 갈 것 같은 9회말 2아웃에서 매리너스는 대타 작전을 썼죠. 매리너스의 주전 포수로 25개의 홈런을 기록하고 있던 칼 롤리가 타석에 섰습니다. 볼카운트 3-2까지 승부를 끌고 간 롤리의 방망이가 도밍고 아세베도의 시속 86마일(약 138km)짜리 슬라이더에 힘차게 돌았습니다.

맞는 순간 홈런을 직감할 수 있을 만큼 큰 타구에 시애틀 팬들은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공은 쭉쭉 뻗어가 우측 담장을 훌쩍 넘겼죠. 2대1, 매리너스의 끝내기 승리였습니다. 팬들이 열광하는 가운데 현지 중계진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Drought is over!”

직역하면 가뭄은 끝났다는 말인데, 미국 스포츠에서 ‘drought’는 우승이나 플레이오프 진출을 오랜 시간 이뤄내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가뭄이 끝났다는 얘기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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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롤리가 끝내기 홈런으로 매리너스의 플레이오프행을 이끄는 순간. / USA투데이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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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리너스는 이날 승리로 와일드카드 결정전(3전 2선승제) 진출을 확정하며 2001년 이후 21년 만에 ‘가을 야구’ 무대에 서게 됐습니다. 작년까지 매리너스는 20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죠. 현재 진행형 기록으로는 미국 4대 프로 스포츠팀 중 최장 기록이었습니다.

플레이오프 진출 팀이 8개로 늘어난 1995년 이후로 따져보면, ‘몬트리올 엑스포스/워싱턴 내셔널스(2005년 연고 이전)’가 30년(1982~2011), 캔자스시티 로열스가 28년(1986~2013), 밀워키 브루어스가 25년(1983~2007), 토론토 블루제이스가 21년(1994~2014) 연속으로 ‘가을 야구’ 무대에 서지 못했습니다.

매리너스가 올해 ‘플레이오프 가뭄’ 해갈에 성공하면서 동병상련이었던 다른 종목 팀에도 눈길이 갑니다.

NBA(미프로농구)에선 새크라멘토 킹스가 2006-2007시즌부터 16시즌 연속으로 플레이오프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30팀이 뛰는 NBA에선 절반 이상인 16팀이 플레이오프에 나가기 때문에 MLB보다 확률이 높은 편입니다. 올 시즌 MLB는 30팀 중 12팀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만, 2019년까지만 해도 10팀이었습니다. 그만큼 문이 더 좁다는 거죠.

아무튼 새크라멘토 킹스는 절반 이상이 경험하는 플레이오프를 16년 연속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크리스 웨버와 마이크 비비, 페야 스토야코비치 등이 뛰면서 우승 문턱까지 갔던 ‘밀레니엄 킹스’ 시절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입니다.

32팀 중 16팀이 플레이오프행 티켓을 거머쥐는 NHL(북미아이스하키리그)에선 버펄로 세이버스가 2010-2011시즌 이후 11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가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역시나 32팀이 우승 경쟁을 펼치는 NFL(미프로풋볼)의 불명예 기록은 뉴욕 제츠가 가지고 있네요. 2010년 이후로 11시즌 연속 정규리그만 치르고 있습니다. 1990년 10개에서 12개로 플레이오프 진출 팀을 늘린 NFL은 작년부터 14팀으로 이를 다시 확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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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하고 기뻐하는 매리너스 선수들. / USA투데이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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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년대를 풍미한 스타들

박찬호로 인해 1990년대에 MLB를 접한 국내 야구 팬들에게 시애틀 매리너스는 꽤 매력적인 팀으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스타는 켄 그리피 주니어(53)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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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그리피 주니어는 약물 복용 선수가 범람하던 시대에 '청정 타자'로 아름다운 기록을 남겼다. /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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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쾌한 타격 폼으로 유명했던 그는 1989년부터 1999년까지 매리너스에서 뛰면서 417홈런 1216타점을 기록한 수퍼스타입니다. 1996년부터 1999년까지 4시즌 동안엔 시즌 평균 기록이 52홈런 142타점일 정도로 가공할 타격을 선보였습니다. 2000년 신시내티 레즈로 이적하며 성적이 뚝 떨어지긴 했지만, 2009~2010시즌 다시 매리너스 유니폼을 입고 은퇴한 시애틀의 자랑이죠.

그가 마크 맥과이어, 새미 소사와 함께 펼친 1998년 홈런 레이스는 아직도 팬들의 기억 속에 생생한데요. 당시 맥과이어가 70개로 단일 시즌 홈런 최다 기록을 세웠고, 소사는 66개로 2위를 했죠. 56개를 쳤음에도 두 선수에 가리고 말았던 그리피는 시간이 흘러 맥과이어와 소사의 약물 복용 이력이 드러나면서 ‘청정 홈런왕’으로 다시 재조명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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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리너스 시절의 알렉스 로드리게스. /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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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매리너스엔 알렉스 로드리게스(47)도 있었죠. 1993년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매리너스에 입단한 그는 1998시즌 42홈런 213안타 124타점을 올리는 등 매 시즌 맹활약하며 그리피 주니어와 함께 매리너스 타선을 이끌었습니다. 로드리게스는 이후 텍사스 레인저스를 거쳐 뉴욕 양키스에서 뛰면서 통산 696개(역대 4위)의 홈런을 날립니다. 하지만 약물 의혹이 불거지면서 명예를 잃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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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리너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에드가 마르티네스. / 트위터


MLB 역대 최고 지명 타자로 꼽히는 에드가 마르티네스(59)도 매리너스 하면 생각나는 타자입니다. 통산 309홈런 2247안타를 친 그는 2019년 마지막 기회였던 10수째에 85.4%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습니다.

매리너스에서만 18년을 뛴 마르티네스는 그리피와 함께 시애틀 팬들의 가장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홈 구장인 T-모바일 파크 밖엔 ‘에드가 마르티네스 드라이브’라고 명명된 길이 있을 정도니까요. 그리피와 마르티네스는 야구장 앞에 동상도 세워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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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의 에드가 마르티네스 드라이브. /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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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리너스 홈구장 앞의 마르티네스 동상. /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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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리너스 홈구장 앞 켄 그리피 주니어 동상. /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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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진엔 그 유명한 랜디 존슨(59)이 있었습니다. 208cm의 큰 키에서 뿌리는 평균 구속 150km 중후반 대의 패스트볼이 어마어마했죠. MLB 최고 좌투수 중 하나로 평가받는 그는 1995년 매리너스 유니폼을 입고 사이영상을 받았습니다. 그해 기록은 18승 2패, 평균자책점(ERA) 2.48. 무시무시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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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리너스 시절의 랜디 존슨. 1995년엔 사이영상을 받았다. / 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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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창단한 매리너스는 미국 북서부 워싱턴주에 뚝 떨어져 있어 이동 거리가 가장 긴 팀이었습니다. 그만큼 선수들은 힘들 수밖에 없죠.

오랜 시간 하위권을 전전하던 매리너스는 존슨이 사이영상을 받은 1995년, 처음으로 ‘가을 야구’를 맛봅니다. 아메리칸리그 디비전시리즈(ALDS)에선 뉴욕 양키스를 3승2패로 물리쳤지만, 챔피언십시리즈(ALCS)에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2승4패로 고배를 마시죠.

매리너스는 1997년에 한 번 더 플레이오프에 오르지만, ALDS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에 1승3패로 무릎을 꿇고 맙니다.

1990년대는 매리너스엔 창단 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무대 경험을 선사한 시간이 됐습니다. 수많은 스타들이 등장하며 빅리그에 존재감을 심어준 시대였죠. 야구 인기가 없어 연고지 이전 얘기까지 나왔던 시애틀이 야구로 들끓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합니다.

◇ 찬란했던 2001 정규시즌

매리너스는 2000년대에 접어들며 팀의 얼굴이 바뀌게 됩니다. 에이스 랜디 존슨은 1998년 시즌 중반 휴스턴 애스트로스로 떠났죠. 그리피는 2000시즌을 앞두고 신시내티 레즈로 이적했고, 로드리게스는 2001시즌 텍사스 레인저스로 유니폼을 갈아입습니다.

대망의 2001시즌, 매리너스엔 엄청난 루키가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스즈키 이치로(49)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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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이치로는 매리너스에서 수많은 영광을 이뤘다. /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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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로는 일본 무대를 정복하고 미국으로 온 28세의 ‘중고 신인’이었습니다. 1992년부터 2000년까지 오릭스 블루웨이브에서 뛰면서 통산 타율 0.353을 기록했는데 이는 비공식 역대 최고 타율 기록입니다. 공식 기준인 4000타수에 381타수가 부족하긴 하지만 공식 1위가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의 0.318이니 이치로의 기록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이치로는 1994년부터 2000년까지 7년 연속 일본 리그 타격왕에 올랐습니다. 1994시즌 타율은 0.385였고, 일본에서 마지막 시즌인 2000년엔 4할 타율에 도전하다가 0.387로 시즌을 마쳤습니다. 1996년엔 재팬시리즈 우승 반지도 끼게 되죠. 1994~1996년엔 퍼시픽리그 MVP를 3년 연속 받았습니다.

일본에서 더는 이룰 것이 없었던 이치로는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1312만5000달러를 제시한 매리너스 유니폼을 입었습니다.

이치로는 미국에서도 일본 시절 등번호인 51번을 달고자 했으나 하필 그 번호는 1998년 팀을 떠난 랜디 존슨이 달았던 번호라 구단에선 준(準) 영구 결번이었죠. 이치로는 존슨에게 51번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겠다는 약속을 담은 편지를 보내 결국 51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001시즌 시애틀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이치로는 아메리칸리그 1번 타자로 나와 내셔널리그의 선발 존슨과 ‘51번’ 투·타 맞대결을 벌이며 그 약속을 지켰죠. 존슨을 상대로 내야안타를 치고 나간 이치로는 도루까지 성공했습니다. 51번은 이치로가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면 존슨과 함께 매리너스에서 공동 영구결번으로 지정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아, 참고로 2001 올스타전은 은퇴를 앞둔 ‘철인’ 칼 립켄 주니어(볼티모어 오리올스)가 박찬호(LA 다저스)로부터 홈런을 뽑아낸 그 올스타전입니다. 라이브볼 시대 최고 유격수로 꼽히는 립켄 주니어는 앞으로 깨지기 어려운 2632경기 연속 출장의 대기록을 가진 레전드죠.

다시 2001시즌 얘기로 돌아와 볼까요? 이치로가 합류한 매리너스는 그 해 고공 행진을 하게 됩니다.

일단 100타점을 넘긴 선수가 세 명 나왔습니다. 2루수 브렛 분이 37홈런 141타점으로 타선을 이끌었고, 프랜차이즈 스타 에드가 마르티네스도 지명타자로 나서 23홈런 116타점을 올렸죠. 중견수 마이크 캐머런은 25홈런 110타점을 기록했습니다. 수비할 때 헬멧을 쓰는 모습으로 팬들에게 익숙한 1루수 존 올러루드도 21홈런 95타점으로 뒤를 받쳤죠.

투수진에선 프레디 가르시아(18승6패, ERA 3.05), 제이미 모이어(17승4패, ERA 3.43) 등 4명이 15승을 넘겼습니다. ‘대마신’으로 불렸던 마무리 사사키 가즈히로가 45세이브를 올리며 뒷문을 걸어 잠갔죠.

하지만 역시 가장 놀라운 성적을 남긴 이는 이치로였습니다. 타율 0.350, 242안타, 56도루로 타격왕과 최다안타, 도루왕을 거머쥐면서 신인왕과 아메리칸리그 MVP를 석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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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승 소식을 전한 2001년 당시 시애틀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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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리너스는 2001시즌 리그 역대 한 시즌 최다승 타이기록인 116승을 올립니다. 이 기록은 여전히 깨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해 매리너스가 배출한 올스타 선수만 8명이었으니 그야말로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었습니다(톰 행크스와 멕 라이언이 주연한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입니다. 1993년 작품이니 정말 오래됐네요).

그해 매리너스는 ALDS에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3승2패로 물리치고 ALCS에 오릅니다.

상대는 월드시리즈 4연속 우승을 노리는 뉴욕 양키스. 2000년 ALCS에서 양키스에 2승4패로 밀려 탈락했던 매리너스는 정규리그 최다승의 기세를 안고 나섰지만, 이번에도 양키스에 1승4패로 설욕에 실패하고 무릎을 꿇고 맙니다.

그렇게 아쉽게 ‘가을 야구’를 마감했을 때만 해도 매리너스가 이후 20년 동안 플레이오프에 오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팬들이 있었을까요?

2001시즌 116승을 한 매리너스는 이듬해 93승으로 성적이 뚝 떨어지면서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 3위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합니다. 사실 93승은 나쁘지 않은 성적이지만, ‘머니볼’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가 20연승을 달리며 103승, 그해 월드시리즈 우승팀 애너하임 에인절스(현 LA 에인절스)가 99승을 올리는 바람에 밀려버렸죠.

◇ 길었던 플레이오프 가뭄

매리너스가 마지막으로 플레이오프에서 뛰었던 2001년은 어떤 일이 있었던 해였을까요? 가장 큰 사건은 9·11 테러일 겁니다.

실제 당시 양키스는 월드시리즈 4·5차전에서 극적인 역전을 이끌어내며 9·11 테러로 실의에 빠진 뉴욕 시민들에게 기쁨을 선사했다고 하죠. 그때 양키스에 두 차례 동점 홈런과 한 차례 끝내기 홈런을 내준 이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마무리 김병현이었고요.

그해 나온 영화로는 ‘친구’, ‘엽기적인 그녀’, ‘반지의 제왕: 반지원정대’,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등이 있습니다. 드라마로는 ‘태조 왕건’, ‘여인 천하’ 등이 있겠네요. 제법 까마득하죠?

미국 현지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매리너스가 21년 만에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하자 MLB.COM은 “매리너스가 2001년 10월 23일 ALCS 5차전에서 뉴욕 양키스에 패할 당시 극장엔 영화 ‘슈렉’과 ‘분노의 질주’가 상영되고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2002년부터 2021년까지 매리너스가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는 동안 MLB도 숨 가쁘게 돌아갔습니다. 매리너스에서도 많은 일이 있었죠.

이른바 매리너스의 ‘암흑기’ 동안 가장 빛난 선수라면 ‘킹(King)’이라 불린 우투수 펠릭스 에르난데스(36)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베네수엘라 출신으로 2005년부터 매리너스 유니폼을 입은 에르난데스는 2010년 아메리칸리그 사이영상을 받았고, 2012년 8월 15일엔 탬파베이 레이스전에서 퍼펙트게임을 달성했습니다. 이후 MLB에선 퍼펙트게임이 나오질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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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에르난데스는 시애틀 마운드를 꿋꿋이 지킨 수퍼스타다. / 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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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난데스는 매리너스에서 15시즌을 뛰면서 169승136패, 평균자책점 3.42를 기록했죠. 시애틀 팬들은 팀 성적이 부진한 가운데에서도 마운드를 꿋꿋이 지킨 그를 사랑했습니다. 홈구장엔 에르난데스를 응원하는 전용 존인 ‘The King’s Court’가 따로 있을 정도였죠.

에르난데스가 등판하는 날이면, 팬들은 그곳에서 노란색 킹 티셔츠를 입고 삼진을 상징하는 ‘K’를 들며 열렬한 응원을 펼쳤습니다. 이 모습은 매리너스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하지만 에르난데스는 15년간 시애틀 마운드를 지키면서도 ‘가을 야구’ 무대를 한 번도 밟지 못하고 은퇴했습니다. 2019시즌을 끝으로 매리너스를 떠난 그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볼티모어 오리올스 산하 마이너 리그 팀에서 뛰었지만, 빅리그 무대에 다시 오르진 못했죠. 매리너스의 ‘플레이오프 가뭄’과 함께 비운의 에이스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치로도 루키 시즌인 2001시즌 한 번 플레이오프에 뛴 이후엔 매리너스에서 ‘가을 야구’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2001~2010년 아메리칸리그 외야수 부문 골드글러브(포지션별 최고 수비수에게 주는 상)를 받았고, 2001년과 2007년, 2009년엔 실버슬러거(포지션별 최고 타자에게 주는 상)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2004년에는 262안타를 치며 MLB 역대 한 시즌 최다안타 기록도 세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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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이치로 자신의 통산 3천86회 안타를 친뒤 관중에게 헬멧을 벗고 인사하는 시애틀 마리너즈 스즈키 이치로(AP=연합뉴스) Seattle Mariners' Ichiro Suzuki tips his batting helmet to fans after hitting a single against the Los Angeles Angels in the fourth inning during a baseball game Thursday, April 16, 2009, in Seattle. With the hit, Suzuki set the record for most career hits by a Japanese player. The eight-time All-Star and Gold Glove outfielder hit a one-hop smash into right field off Joe Saunders for his 3,086th hit. (AP Photo/Elaine Thompson)/2009-04-17 13:06:09/ <저작권자 ⓒ 1980-2009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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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로는 2012년 7월, 매리너스에 트레이드를 요청해 뉴욕 양키스 유니폼을 입습니다. 팀의 리빌딩을 위하는 동시에 우승 도전에 대한 욕심도 담긴 결정이었죠. 그해 양키스가 ALCS에 오르면서 이치로도 11년 만에 ‘가을 야구’ 무대를 밟습니다. 이치로의 MLB 경력 중 유일한 플레이오프 경험이었죠. 2015년 마이애미 말린스로 이적한 이치로는 2018년 매리너스로 돌아왔고, 2019년 3월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MLB 특별 개막전에 나선 뒤 은퇴를 발표합니다.

매리너스의 부진이 길어지면서 헛헛했던 시애틀 팬들의 마음을 달래준 건 NFL 시애틀 시호크스였습니다. 시호크스는 2006년과 2014년, 2015년 수퍼볼에 올라 한 차례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2014년 수퍼볼은 시호크스가 덴버 브롱코스를 43대8로 대파해 가장 싱거운 수퍼볼 중 하나가 되었죠. 반면 톰 브래디의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와 맞붙은 2015년엔 막판 역전 터치다운 기회를 눈앞에 두고 인터셉트를 당하며 24대28로 분루를 삼켰습니다.

◇ 드디어 꿈을 이루다

매리너스는 지난해 정규리그 최종전까지 플레이오프행 가능성이 있었지만, 결국은 90승72패를 기록, 와일드카드 순위에서 2위와 2게임 차인 4위로 아깝게 기회를 놓쳤습니다. 와신상담한 매리너스는 올해 드디어 오랜 숙원을 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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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롤리의 끝내기 홈런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한 매리너스 선수들이 환호하고 있다. /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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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 팜에서 키워낸 선수들의 활약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특히 22세의 훌리오 로드리게스는 켄 그리피 주니어, 알렉스 로드리게스, 스즈키 이치로를 잇는 매리너스 프랜차이즈 스타로 자리 매김을 하는 분위기입니다.

도미니카공화국 출신으로 이름을 줄여 ‘J-Rod’로 불리는 로드리게스는 2017년 국제 아마추어 자유계약으로 매리너스에 입단했습니다. 올 시즌 MLB에 입성한 그는 4월에만 도루 9개를 하며 빠른 발을 자랑하더니 5월엔 홈런 6개를 몰아치며 장타력을 과시했습니다. 7월 4일엔 역대 데뷔 후 가장 이른 시간에 15홈런 20도루(81경기)를 기록한 선수가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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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리오 로드리게스는 매리너스의 차세대 프랜차이즈 스타다. /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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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22 올스타전 홈런 더비 4강전에서 2연속 우승자인 피트 알론소를 물리치며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결승에서 후안 소토에 18대19로 패하며 우승을 내주긴 했지만, 새로운 거포의 등장을 제대로 알렸죠.

로드리게스는 올 시즌 타율 0.284, 28홈런 75타점 25도루로 호타준족의 면모를 마음껏 뽐냈습니다. 루키가 ‘25홈런-25도루’를 달성한 것은 2007년 크리스 영(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과 2012년 마이크 트라웃(LA 에인절스)에 이어 세 번째 기록입니다. 올해 아메리칸리그 신인왕은 예약한 수준입니다.

로드리게스는 8월, 매리너스와 보장 12년 2억1000만달러, 최대 17년 4억7000만달러(약 6712억원)의 초대형 계약을 맺었습니다. 얼마나 매리너스 구단이 J-Rod를 아끼는지 알 수 있는 규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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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리너스에 지명돼 올 시즌 10승 투수로 성장한 로건 길버트. / USA투데이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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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리너스가 2018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14번으로 지명한 우완 선발 로건 길버트는 올해 10승 투수로 올라섰습니다. 13승6패, ERA 3.20의 수준급 피칭을 선보였죠.

2019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20번으로 매리너스의 지명을 받은 조지 커비도 8승5패, ERA 3.39로 잘 던졌습니다. 커비는 지난 8월 워싱턴 내셔널스전에 선발 등판해 경기 시작과 함께 1구부터 24구까지 모두 스트라이크를 던져 이 부문 역대 최고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매리너스는 올해 영입도 좋았습니다. 올 시즌을 앞두고 신시내티 레즈에서 매리너스로 유니폼을 바꿔 입은 유헤니오 수아레스는 31홈런 87타점으로 팀 내 최다 홈런을 쳤습니다.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이적한 로비 레이는 류현진을 제치고 블루제이스 에이스로 올라선 작년만큼의 활약은 아니지만, 12승12패, ERA 3.71로 선발의 한 축을 담당했습니다.

후반기에 영입된 루이스 카스티요도 매리너스에서 4승2패, ERA 3.17로 준수한 모습을 보여줬고요. 올 시즌 캔자스시티 로열스에서 4홈런 21타점에 그쳤던 카를로스 산타나도 6월 말 매리너스로 트레이드된 후엔 15홈런 39타점으로 살아났습니다.

매리너스의 또 다른 강점은 탄탄한 불펜입니다. 불펜 ERA가 3.33으로 올 시즌 MLB 6위입니다. 폴 시월드(65경기 8홀드 20세이브 ERA 2.67)와 펜 머피(64경기 8홀드 2.99), 안드레스 무뇨스(64경기 22홀드 4세이브 2.49), 에릭 스완슨(57경기 14홀드 3세이브 1.68), 디에고 카스티요(59경기 9홀드 7세이브 3.64) 등이 올 시즌 불펜 주역으로 활약했습니다.

잘 나가는 팀엔 특별한 ‘모멘텀’이 있습니다. 매리너스엔 14연승이 큰 약이 됐습니다. 7월 2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전을 앞두고 36승42패로 처져 있던 매리너스는 14연속 승리를 거두며 50승42패, 아메리칸리그 서부 지구 2위로 전반기를 마쳤습니다.

이 연승을 계기로 ‘위닝 멘털리티’를 얻게 된 매리너스는 시즌 막바지까지 페이스를 잘 유지하며 플레이오프행 티켓을 따낼 수 있었습니다.

조선일보

플레이오프 진출 샴페인 파티를 즐기는 스캇 서비스 매리너스 감독. / USA투데이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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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오프 진출이 확정된 순간 가장 감격에 젖은 이는 스캇 서비스 매리너스 감독이었습니다.

미국 야구 대표팀의 주전 포수로 1988 서울올림픽에 출전했던 그는 현역 때도 1998 시카고 컵스 시절 딱 한 번 포스트시즌에 출전했습니다. 2016년부터 매리너스 지휘봉을 잡고 7년차에 꿈을 이룬 그는 “매일 아침 일어나 야구장으로 올 때마다 월드시리즈 우승 순간을 생각했다”며 “이제 우리에게 기회가 왔다”며 기뻐했습니다.

매리너스는 한국 시각으로 8일 오전 1시 류현진의 소속팀인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와일드카드 결정(3전 2선승제) 1차전을 치릅니다. 와일드카드 결정전은 모든 경기가 상위 시드 팀의 홈에서 열려 매리너스는 원정 시리즈를 소화해야 하죠. 매리너스가 21년 만에 시애틀에서 ‘가을 야구’를 하기 위해선 블루제이스를 꺾고 ALDS로 올라가야 합니다.

21년 만에 플레이오프에 오른 매리너스는 올가을 어떤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줄까요? 당장 우승을 차지하기엔 전력이 떨어져 보이지만 ‘야구 몰라요’란 말이 있듯 가을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특별히 응원하는 팀이 없다면 매리너스의 월드시리즈 우승 도전기를 지켜보는 것도 10월의 MLB를 즐기는 좋은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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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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