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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여적] 폐지 줍는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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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여성 노인이 길거리에서 모은 폐지를 정리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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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가난한 노인은 폐지를 줍는다. 동네에서 작은 카트나 리어카에 폐지를 쌓아 담고 끄는 노인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한국에서 폐지를 줍고 고물상에 내다팔아 먹고사는 노인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다. 학자들은 ‘폐지 줍는 노인’을 한국만의 현상으로 바라본다. 세계 어디에도 이렇게 많은 노인들이 폐지를 주우러 다니는 나라는 없다고 한다.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는데 노인복지 정책은 미흡하고 노인들의 일자리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 등이 맞물리며 빚어진 현상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폐지 줍는 노인이 20년 넘게 이어졌는데도 복지 대책은커녕 실태 파악조차 제대로 안 됐다는 점이다. 명절 때 선물로 주고받은 과일 상자가 누군가에게는 두꺼워서 값나가는 소중한 물건이자 경쟁거리가 된다는 정도, 아니면 캄캄한 밤에 리어카를 끌다 교통사고를 당한 안타까운 사연들을 피상적으로 알 뿐이었다. 정작 이 노인들은 누구이고 얼마나 많은지, 왜 폐지를 줍고 얼마나 힘든 노동을 하는지는 잘 몰랐다. 폐지 줍는 노인들은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열악하고 위험한 노동 환경에 방치돼 온 것이다.

하루 평균 이동 거리 12.3㎞에 노동 시간은 11시간20분. 이렇게 일해서 버는 일당이 1만428원. 시급으로 환산하면 948원으로 올해 최저임금 9160원의 10% 수준이다. 이처럼 고된 일상을 버티며 생계를 위한 유일한 활동으로 폐지를 줍는 노인이 전국에 최소 1만4800명, 최대 1만5181명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이 5일 공개한 ‘폐지수집 노인 현황과 실태 연구보고서’를 통해 밝힌 내용이다. 폐지 줍는 노인의 규모와 생활 실태를 파악한 것은 처음이다. 열악하다는 말로도 다 표현하지 못할 우리 사회의 민낯이다.

노인들은 오로지 생존을 위해서 폐지 줍는 노동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가 그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해 제도 바깥의 노동으로 내몬 것이다. 노인들을 빈곤의 종착지로 향하게 방치해서는 안 된다. “당장 그만두고 싶지만, 먹고살 길이 없어 그만둘 수가 없다”는 노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폐지 줍는 노인에 대한 대책, 아니 노인 빈곤대책을 세워야 한다.

차준철 논설위원 cheo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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