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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한국에도 '끈적한' 물가가 왔다…한은, 또 거인의 발걸음 내딛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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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끈적한 물가'가 상륙했다. 국제유가 하락 등의 영향으로 국내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세가 두 달 연속 둔화했지만, 외식과 가공식품처럼 한번 가격이 오르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품목의 상승세가 무섭다. 쉽게 떨어지지 않는 물가를 잡기 위해 한국은행의 긴축도 빨라질 것이라는 전망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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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소비자물가가 5% 중반대로 오르면서 상승세가 두 달째 누그러졌지만 농산물 가격과 외식 물가는 여전히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5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는 108.93으로 작년 같은 달보다 5.6% 상승했다. 사진은 이날 점심시간 서울의 한 식당가.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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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통계청이 발표한 9월 CPI는 1년 전보다 5.6% 올랐다. 8월(5.7%)보다 상승률이 0.1%포인트 줄어들며 상승세가 소폭이나마 둔화했다. 다만 전월 대비로는 0.3% 오르며 물가 상승세가 이어졌다. 이미 올해 연간 물가상승률(1~9월·전년 누계비)은 5%를 기록했다. 연간 물가상승률이 5%를 넘어선 건 1998년(7.5%) 이후 처음이다.

물가 상승세가 둔화한 건 국제유가 하락의 영향이 크다. 석유류가 1년 전보다 16.6% 올랐는데, 7월(35.1%)과 8월(19.7%)과 비교하면 상승 폭이 줄었다. 한국이 주로 수입하는 두바이유 평균 가격이 지난 8월 배럴당 97.7달러에서 9월에 배럴당 90.6달러로 하락한 영향이다. 한은에 따르면 석유류 가격 하락은 CPI 상승률을 0.15%포인트 끌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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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CPI 상승률은 둔화했지만, 국제 유가 하락을 제외하면 물가 상승 압력은 더 거세졌다. '공급발' 물가상승이 내준 자리를 '수요발' 물가 상승이 꿰찼다. 가격 변동 폭이 큰 식료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근원물가는 1년 전보다 4.1% 오르며 8월(4%)보다 오름폭이 커졌다. 오름폭으로는 2008년 12월(4.5%) 이후 13년 9개월 만의 최대치다.

물가 상승의 수요자 측 압력을 반영하는 개인서비스 물가는 6.4% 뛰며, 지난 8월(6.1%)보다 오름폭이 더 커졌다. 특히 외식 물가 상승률은 9%로 1992년 7월(9%) 이후 30년 2개월 만에 가장 높았다. 한 번 오른 외식물가는 좀처럼 내리지 않아 물가 상승세를 길게 끌고 간다. 외식 물가처럼 하방경직성이 큰 가공식품 물가도 8.7% 오르며 2009년 6월(9%)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이환석 한은 부총재보는 이날 물가점검회의를 열고 “앞으로 소비자물가는 상당 기간 5~6%대의 높은 오름세를 이어갈 것”이라며 “수요측 물가 압력을 반영하는 개인서비스 물가는 상당 기간 6%대의 높은 오름세를 이어갈 전망”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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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정부가 내세워왔던 10월 물가 정점론도 흔들리게 됐다. 수요 측 물가 상승 압력이 이어지는 가운데, 그나마 물가를 억눌러온 국제 유가 등 공급 측면의 상승 압력도 다시 커질 수 있어서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플러스(+)가 유가 하락 방어를 위해 감산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수입 물가를 올리는 원화가치 하락(환율 상승)도 변수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지난달 26일 국회에서 “예상보다 유가가 빨리 떨어지고 있지만, 원화 가치가 절하돼 그 효과가 상쇄되고 있다”며 “물가가 내려오는 속도가 굉장히 늦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10월부터 오르는 전기료와 가스요금 등 공공요금 인상도 소비자물가를 0.3%포인트가량 끌어올릴 전망이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 교수는 “공급 측면에서 시작된 불이 수요 측면으로 옮겨붙고 있다”며 “겨울철 유럽에서 석유 수요가 증가하는 등 국제 유가의 불확실성이 큰 만큼 올해 겨울은 지나야 물가의 정점 여부 등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수요 측 물가 상승은 중앙은행의 강도 높은 긴축을 부른다. 지난 8월 미국 CPI 발표 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훨씬 강도 높은 긴축을 할 것이라는 전망이 퍼진 것도 근원 CPI 등 수요 측 물가 상승 압력이 다시 커지면서다. 특히 한 번 오르면 좀처럼 내려가지 않는 주거비 등 경직성 물가지수(Sticky-CPI)상승의 충격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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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기준금리 추이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한국은행,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끈적한 물가의 등장에 한은의 긴축 강도도 더 세질 전망이다. 이미 Fed의 예상을 뛰어넘는 긴축에 이 총재는 "10월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새로운 결정이 날 것"이라며 빅스텝(기준금리 0.5%포인트 인상)을 강하게 시사했다. 한은이 오는 12일은 물론이고, 11월에도 빅스텝을 밟을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임재균 KB증권 연구원은 "한국도 미국처럼 수요 발 인플레이션이 광범위하게 진행되는 것으로 확인됐다"며 "물가 우려가 높다는 점에서 한은이 10월과 11월 기준금리를 각각 0.5%포인트씩 인상하고, 내년에도 추가 인상에 나설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다만 한은의 긴축 행보에 고려해야 할 변수가 더 많아졌다. CPI 상승률이 둔화하는 상황에서 금리 인상에 가속 페달을 밟는 건 부담이 될 수 있다. 치솟은 가계부채도 부담이다. 각국 중앙은행들은 물가를 잡기 위해 단기간 경기 침체를 감수하겠다는 입장이지만, 가계부채가 많은 한국은 침체의 골이 더 깊을 수 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실장은 “한국은 국내총생산(GDP)대비 가계부채 수준 등이 미국보다 높기 때문에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인한 경기 침체가 더 장기간 지속할 수 있다”며 “두 차례 연속 빅스텝 인상을 하는 건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안효성 기자 hyoz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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