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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찢더라도... 외국인 선수들이 한국 야구에 던진 충격 [김은식의 야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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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식의 야구야] 현대와 박찬호가 앞당긴 외국인 선수 시대

1987년 민주화의 열풍 속에서 프로야구의 인기도 잠시 주춤했다. 야구장보다는 거리와 유세장에 더 많은 군중이 모이던 시대였고, 한국시리즈의 우승자보다는 16년 만에 치러지는 직선제 대통령 선거의 당선자에 더욱 관심이 쏠리던 시절이었다. 프로야구 창설을 진두지휘했던 전두환 정권 청와대가 물러나면서 프로야구의 수명도 함께 소진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야구장의 연간 관중수는 해마다 최대 기록을 경신하며 불어났고, 그럼으로써 한국의 프로야구가 단순히 정권의 기획에 의해 창조된 '관제 문화'로만 치부될 수 없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그리고 1990년대 초반부터 외국인 선수 선발을 허용해달라는 구단들의 요구가 꾸준히 제기되기 시작했다. 야구 인기의 상승, 즉 야구에 대한 '수요'가 확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급' 면에서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초반에 두 배 가까이 폭발적으로 증가해 50개 선에 도달한 전국의 고교야구팀 수는 그 뒤로 정체되었는데, 1990년대 초반까지도 별다른 차이가 없었을 정도였다. 물론 프로야구 창설 직후인 1980년대 중반에 60개 가까이까지 늘어난 적도 있었지만, 실업야구가 고사하면서 예상과 달리 야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일자리의 수가 제자리걸음을 하자 마구잡이로 문을 열었던 몇몇 학교의 야구부들이 다시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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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론 우즈 ▲ 메이저리그에서 뛴 경험이 전혀 없었던 우즈는 당초 많은 주목을 받는 선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성공하겠다는 절실함을 감지한 OB 베어스에 지명되었고, 역대 최고의 외국인 타자 중 한 명으로 남게 됐다. 한국에서 5년간 174홈런 510타점을 기록한 뒤 일본에서 다시 6년간 뛰면서 그 이상의 활약을 했다. ⓒ 두산 베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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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1990년대 들어서는 재일교포 선수들의 효용이 줄어드는 문제도 더해졌다.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 엔화의 가치가 치솟으면서 촉발한 일본 경제의 거품은 한국 프로야구단들이 더 이상 김일융이나 장명부 같은 수준급 재일교포 선수들의 몸값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만들었고, 반대로 창설 후 몇 년 사이에 빠르게 발전한 한국 프로야구의 수준은 이제 일본에서 주전이 되지 못한 선수들이라면 한국에서도 버텨내기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앞뒤가 꽉 막힌 상황에서 구단들이 선수를 뽑을 수 있는 통로는 8개 구단에게 똑같은 기회가 주어지는 드래프트 뿐이었고, 그런 환경은 모기업의 자금력이 가장 빈약했던 해태 타이거즈가 '광주의 물가는 서울보다 30%쯤 낮다'는 명분으로 선수들의 연봉 역시 30%쯤 후려치는 억지를 감행하면서도 리그 우승을 휩쓰는 데 별 문제가 없었던 배경이 되고 있었다. 돈을 써서라도 성적을 끌어올릴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그룹 총수에게 설명할 길이 없어 애가 타던 대기업 계열 구단들이 일찍부터 '외국인 선수를 뽑게 해달라'며 목소리를 높인 것 역시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판을 흔들 필요가 없던 해태 타이거즈나 어차피 약팀이긴 마찬가지였지만 돈의 요소가 개입된다면 더욱 불리해질 것이 뻔한 쌍방울 같은 구단들이 동의하지 않은 것도 물론이었다. KBO 사무국 역시 소극적인 입장이었는데, 창설 당시부터 지상과제로 삼다시피 해온 '전력의 평준화'를 저해할 우려가 있다는 명분 외에 당장 일자리 감소를 걱정해야 할 고교야구팀들을 비롯한 아마추어 야구계의 반발을 무마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안건은 1990년대 초반부터 꾸준히 상정되었지만 매번 분분한 논쟁 끝에 보류되곤 했다.

현대의 프로야구 참여와 박찬호의 미국 진출이 불러온 변화

하지만 1993년부터 1996년 사이에 몇 가지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1995년 9월, 끈질기게 프로야구 참가를 시도하던 현대가 결국 태평양 돌핀스를 매입해 KBO 이사회에 진입했다. 당시 야구에 대한 현대그룹의 열정은 무지막지했다. 프로팀 창단 의향이 기존 구단들의 반대로 무산되자 아예 '제 2리그 창설'을 공언하며 실업팀 '현대 피닉스'를 창단해 프로팀 제시액의 두세 배에 이르는 거액을 안겨주어 아마추어 유망주들을 싹쓸이했을 정도였다. 그런 현대가 대표적인 '짠돌이 구단' 태평양을 대신해 KBO 이사회에 참가하면서 반대표 하나가 찬성표로 뒤집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좀 더 근본적인 상황의 변화는 1993년에 한양대 2학년생 투수 박찬호가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에 입단한 데서 비롯되었다. 유학비자를 활용하는 새로운 방법을 통해 최동원과 선동열을 비롯한 많은 선배들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가로막았던 병역 문제를 우회하고 미국의 프로구단에 입단하는 데 성공한 박찬호가 이듬해인 1994년에 메이저리그에 성공적으로 데뷔하자 자극을 받은 적지 않은 고교야구의 정상급 선수들이 국내 프로구단들의 지명을 거부하고 해외로 직접 도전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1994년 7월 경희대를 졸업한 외야수 최경환이 자신을 지명한 LG 트윈스 입단을 거부한 채 캘리포니아 에인절스(현 LA 에인절스)와 계약을 맺었고 같은 해 12월에는 중앙대의 3학년생 투수 최창양이 중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필라델피아 필리스에 입단했다. 두 선수 모두 고교와 대학 무대에서 정상급으로 인정받는 경우는 아니었고, 박찬호에 버금가는 가능성을 인정받을 만큼의 특기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두 선수 모두 계약금의 규모는 박찬호의 1/10에도 훨씬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점에서 국내 구단들의 위기감은 더욱 클 수 있었다. 해외 리그에 빼앗길 수 있는 선수들의 규모가 메이저리그 승격을 기대할 수 있는 극소수의 정상급 선수들에 국한되지 않을 수 있다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물론 정상급 선수들도 움직였다. 1995년 말에는 역대 가장 많은 유망주들이 배출되었다는 92학번들이 대학 졸업을 앞두게 됐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은 임선동과 조성민이 나란히 일본 프로팀과 계약을 맺었고 차명주를 비롯한 몇몇 선수들도 메이저리그 입단을 타진한다는 소식이 퍼졌다. 해외진출이라는 대안이 생긴 선수들이 국내 구단들과의 입단계약 협상 과정에서 이전과는 다른 호락호락하지 않은 태도를 보이게 된 것은 당연했다.

그런 배경 위에서 1996년 11월 27일에 열린 이사회에서 외국인 선수 선발을 허용하자는 안건이 가결되었다. '경기력 향상을 통한 팬서비스의 확대'를 주장한 삼성, 현대, LG의 목소리가 해태와 쌍방울을 압도했고, 다른 구단들 역시 외국인 선수 영입으로 인한 지출 증가폭보다는 국내 선수들의 해외 유출로 인한 '품귀현상'에 따른 인건비 상승을 억제하는 효과가 더욱 클 것이라는 계산으로 동조했기 때문이다.

외국인 선수의 등장이 불러온 변화

1997년 11월 미국 플로리다의 세인트피터스버그에서 트라이아웃 캠프에 쌍방울을 제외한 7개 구단과 54명의 선수들이 참가했고, 평가전과 면접을 거쳐 좋은 인상을 남긴 12명의 선수들이 계약에 성공하며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외국인 선수로 이름을 올렸다. 현대와 삼성, OB, 한화가 각각 두 명씩의 선수와 무사히 계약을 맺었고 투수 빅터 콜과의 계약이 결렬된 롯데가 덕 브래디 한 명만을 입단시켰다.

그리고 충분한 계약금도 준비하지 않은 채 형식적으로 참가했던 해태는 왼손잡이 외야수 숀 헤어를 지명하고도 무성의한 협상 끝에 빈 손으로 귀국했지만 시즌 중 팀이 최하위권으로 추락하며 이종범을 일본에 보낸 데 대한 비난이 비등해지자 뒤늦게 계약을 성사시키고 데려오기도 했다. LG도 그 해 트라이아웃에 참가한 선수들 중 가장 화려한 메이저리그 경력을 가지고 있던 주니어 펠릭스와 연봉 수준에 합의하지 못했다가 8월에야 뒤늦게 합류시키면서 2명의 외국인 선수를 보유한 팀이 됐다.

그 12명의 선수들이 모두 좋은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다음 시즌 재계약에 성공한 것은 단 3명(OB의 우즈와 캐세레스, LG의 주니어 펠릭스)에 불과했고, 구단에서 재계약을 희망했지만 거부한 현대의 스캇 쿨바를 포함하더라도 '성공작'이었다고 할 만한 선수는 네댓 명을 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남긴 충격은 작지 않았다. OB의 우즈가 잠실을 홈구장으로 쓰면서도 42개의 홈런을 기록해 한동안은 깨지기 어려운 기록으로 여겨지던 장종훈의 시즌 41홈런 기록을 훌쩍 넘겨버린 것이 대표적이었다. 그리고 현대의 쿨바도 .317의 정확한 타격에 더해 26홈런과 97타점을 기록하는 정상급 활약을 했고 뒤늦게 합류한 주니어 펠릭스도 33경기만을 뛰면서도 6홈런과 21타점을 기록해 그 못지않은 능력을 과시했다.

우즈와 호세, 로마이어와 데이비스

물론 해가 갈수록 한국 무대를 밟는 외국인 선수들의 수준은 더욱 높아졌고, 그들의 활약에 따라 팀의 성적이 좌우되는 경우도 늘어났다. 외국인 선발 2년차인 1999년에 두산의 우즈가 34홈런 101타점으로 여전한 활약을 이어간 데 더해 현대의 피어슨이 31홈런 108타점, 삼성의 스미스가 40홈런 98타점으로 그 못지 않은 위력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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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호세 ▲ 1999년 롯데에 입단해 그는 그 해 팀의 기적적인 플레이오프 역전승과 한국시리즈 진출이라는 사건의 중심에 섰다. 훌륭한 성적 뿐만 아니라 화끈한 성격과 카리스마, 유쾌한 팬서비스를 겸비했던 그는 여전히 롯데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 롯데 자이언츠



하지만 그들보다 더 열렬한 환호를 받은 외국인 선수들은 따로 있었다. 화끈한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36홈런 122타점을 기록한 호세가 롯데를 4년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시키며 부산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45홈런 109타점을 기록한 로마이어와 30홈런 106타점에 35개의 도루를 성공시켜 '30-30' 클럽에 이름을 올린 데이비스는 한화 이글스에게 유일한 우승의 추억을 선물하기도 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성적이 아니라 야구를 하는 방식이었다. 대부분 마이너리그에서도 최상위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고, 한국 리그의 특성에 대한 이해도 거의 없었던 초창기 외국인 선수들은 거칠고 세련된 맛은 부족했지만 당시 한국의 선수들보다 월등히 빠른 공을 던졌고, 또 멀리 쳐냈다. 한국의 타자와 투수들이 이전과 확연히 달라진 구속과 장타력에 적응하는 데 적지 않은 진통을 겪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장타력 있는 타자들의 급증이었다. 꾸준히 20홈런을 쳐줄 만한 중심타자 한 명 구하기도 쉽지 않던 시절 갑자기 30, 40개의 홈런을 날리는 외국인 타자들이 몰려와 리그를 뒤덮으면서 작전보다는 장타에 기대를 거는 경기 운영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다. 선두 타자가 출루했을 때 번트를 대고 도루를 하고 치고 달리기 작전을 걸어 간신히 3루까지 진루시킨 후 타석에 선 외국인타자가 큼직한 홈런을 날려버리며 앞선 노력들을 허탈하게 만드는 경우가 늘어났고, 그럴 바엔 아웃카운트를 아끼며 강공을 통한 대량득점을 노리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이 확산된 것이다.

투수들 또한 새로운 생존 전략을 고민하는 수밖에 없게 됐다. 특히 90년대 중반까지 한국 야구를 지배하던 변화구는 횡으로 휘는 슬라이더였는데, 팔이 길고 배트도 길게 쥐는 외국인 타자들에게 걸려드는 일이 잦아지면서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그래서 종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커브나 포크볼, 투심 패스트볼 같은 공들이 재조명받게 됐는데, 슬라이더를 대신해 포크볼을 연마하기 위해 검지와 중지 사이의 생살을 찢는 수술을 받고 기어이 생애 처음으로 10승 투수 반열에 올랐던 투수 이광우(두산 베어스)의 사례는 그 무렵 투수들이 느끼던 위기감을 대변하는 사례다.

강팀의 조건, 좋은 외국인 선수

1998년에는 스트롱과 쿨바가 투타 양면에서 활약한 현대가, 1999년에는 로마이어와 데이비스가 75홈런 215타점을 합작한 한화가 구단 역사에 첫 우승의 기록을 새겼다. 그리고 그 뒤로도 외국인 선수 두 명이 고르게 활약한 팀은 거의 예외 없이 상위권에 진입했고 외국인 선수 두 명이 함께 실패한 팀은 또한 거의 별 수 없이 하위권으로 추락했다. 그래서 각 구단은 좋은 외국인 선수를 찾는 데 사활을 걸었고, 그 사이에 점점 더 수준 높은 선수들이 더 높은 연봉을 받고 한국을 찾았으며, 그럴 여력이 없었던 해태와 쌍방울의 몰락은 가속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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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 데이비스 ▲ 1999년 한화에 입단한 데이비스는 외국인 최초로 30-30을 달성하며 그 해 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홈런을 치고 그라운드를 돌며 거수경례를 하던 그의 독특한 세리머니는 훗날 피에와 로사리오 같은 한화의 후배 외국인선수들이 따라하면서 다시 데이비스를 떠올리게 하기도 했다. ⓒ 한화 이글스



하지만 격변의 과정에서 한국 야구는 아시아를 넘어 세계의 흐름에 합류했고, 선수들의 기술적 수준 역시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발전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로부터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과 2006년, 2009년 WBC에서의 놀라운 성적들 역시 90년대 말에 시작된 미국 야구와의 직접 대면과정과 떼어서 생각하기 어렵다.

여전히 외국인 선수들이 한국 프로야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2020년 시즌을 기준으로 외국인 선수는 10개 구단 통틀어 30명(투수 20명, 타자 10명)으로 전체 선수의 5%에 불과하지만 성적 면에서는 평균자책점 10위권 투수 중 6명, 홈런 10위권 타자 중 5명을 차지했을 정도다.

하지만 이제는 메이저리그 각 구단 25인 로스터의 경계선상에 선 선수들이 주로 한국 팀들의 부름을 받으며, 그들 중에서도 한국 야구에 대한 이해와 적응을 위한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는 이들만이 성공한다. 그리고 타자 부문에서는 2021년부터 2년 연속으로 한국인 선수들이 홈런 10걸 중 8명씩을 채우며 또 한 번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한국 야구는 그렇게 점점 더 강한 선수들과 함께하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장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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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시 켈리 ▲ 올 시즌 LG 트윈스는 나란히 15승 이상을 달성한 켈리와 플럿코 두 외국인 투수의 선전에 힘입어 오랜만에 우승에 도전하고 있다. ⓒ LG 트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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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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