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 같은 여인' 릴리트, 순종적 여성관에 독침 찌르다[송주영의 맛있게 그림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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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유명한 예술작품도 나에게 의미가 없다면 텅 빈 감상에 그칩니다. 한 장의 그림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맛있게 그림보기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림 이야기입니다. 미술교육자 송주영이 안내합니다.

존 콜리어의 릴리트. 1886년작, 앳킨슨 아트 갤러리 소장

<6>이브가 아닌 릴리트, 당당한 여성을 그리다

아담의 아내를 우리는 이브, 또는 하와로 알고 있다. 그러나 아담에게는 전처가 있었다. 기독교 신자들이라면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라고 경악할 만한 아담의 첫 번째 아내, 그녀의 이름은 릴리트다. 현대의 성서에는 삭제돼 등장하지 않지만, 유대교 신화에 등장하는 릴리트는 아담과 똑같이 흙으로 만들어졌던 첫 파트너다. 릴리트는 아담에게 상위 체위의 성관계를 주장했다가 크게 다툰 후 아담 곁을 떠난다. 이후에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로 다시 여자를 만들었으니 그것이 이브다.

릴리트는 기원전 2000년경부터 서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퍼져 있던 다산의 여신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의 고대 설화와 그리스, 로마의 신화가 뒤섞이며 릴리트는 서서히 뱀과 교합하는 밤의 마녀, 요부로 불리게 됐다. 뱀과 여자를 동일시하는 상징성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요괴 라미아의 이야기와도 유사하다. 라미아는 제우스의 연인이었으나 헤라의 저주를 받아 아이들과 남자를 잡아먹는 괴수가 되었는데, 하반신은 뱀이고 상반신은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고대 신화와 유럽 지역 전설에 등장하는 ‘뱀 같은 여인’을 유럽인들은 라미아, 유대인들은 릴리트라고 불렀다.

왼쪽부터 이소벨 릴리안 그로아그의 마법의 키스. 1890년작. 게임 디아블로 4의 주요 등장 인물인 릴리트.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순종하지 않는 여성, 고대에는 타락의 상징으로 묘사돼

여성을 뱀과 연관해 보는 타락의 상징은 메두사, 라미아, 릴리트에서 동일하게 나타난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뱀의 유혹을 받아 이브가 선악과를 먹게 된 이야기와도 관련이 있다. 마녀이자 요부의 상징으로 군림했던 여성의 모습은 주로 하반신이 뱀, 새, 또는 물고기였고 상반신의 아름다운 얼굴과 풍만한 가슴으로 남자들을 유혹해 잡아 먹거나 죽인다는 설정이다. 성기가 있는 하반신은 인간의 것이 아니며 젊고 아름다운 미모를 무기처럼 다룬다는 이야기에서 모성과 순종성이 없는 여성에 대한 가부장 세계의 거부감을 읽을 수 있다.

여러 예술 장르에서 팜므파탈(악녀)의 대표 아이콘이 된 릴리트는 오랫동안 예술가들이 애정했던 테마다. 금기 되었던 모든 에로티시즘을 부담 없이 발산할 수 있었기에 미술 후원자들에게 커미션을 받아 내기에도 좋았을 것이다. 릴리트는 현대 예술의 다양한 작품들에 다시 등장한다.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가 2023년에 선보일 예정인 게임 '디아블로 4'의 주요 등장인물로 릴리트가 등장하면서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가장 유명한 릴리트는 존 콜리어의 1886년작

그동안 여러 화가들의 릴리트가 있다지만, 그중 백미는 단연 라파엘전파 화가로 대표되는 영국의 존 콜리어의 '릴리트'다. 탐스럽고 풍성한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며 상기된 뺨으로 큰 뱀의 얼굴을 다정히 애무하고 있는 젊은 여인의 모습이다. 알 수 없는 아름다움과 두려움이 보는 이의 마음을 미묘하게 한다.

존 콜리어는 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정규 아카데미 교육을 받은 직업 화가로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로 유명했다. 그의 특별한 가족 구성원들도 화제였다. 장인은 토마스 헨리 헉슬리로,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발 벗고 나서서 옹호했던 식물학자이자, 불가지론(절대신의 진위나 실존 여부는 알 수 없다는 철학적 관점)으로 대표되는 화제의 지식인이었다. 더군다나 존 콜리어는 그의 두 딸 모두와 결혼했던 (겹)사위였다. 여성 화가였던 첫 부인 마리안 헉슬리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한 후 존 콜리어는 죽은 첫 부인의 여동생이자 토마스 헨리 헉슬리의 둘째 딸인 에델 헉슬리와 결혼을 결심했는데, 당시 새로 개정된 영국법으로 결혼이 어려워지자 해외로 나가 혼인했다. 이들의 결혼은 부정한 불륜의 관계는 아니었고, 어려서부터 헉슬리 일가와 한 가족처럼 지냈던 존 콜리어로서는 어떤 의무감에 의한 결혼이었다고 전해진다.

아름다움 천착했지만…낡은 여성관·결혼관 뛰어넘은 명작

존 콜리어는 당시 정계, 재계 인사들의 초상화로 유명세를 얻었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모더니즘의 신세계가 이제 막 열리고 있을 때였던 만큼, 당대 비평가들은 그를 두고 빅토리안 시대의 선과 색채를 답습한다며 창의력이 부족하다는 차가운 평가를 내리곤 했다. 그가 사망하고 신문에 실린 부고란에는 '그는 아름다움을 주제로 하였으나 결국 거기까지였다'라고 기록될 정도였다. 그러나 역사학자이자 소설가인 커시티 워커는 존 콜리어가 당대 비평가들에 의해 평가절하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작품들을 통해 그가 당시 남성들을 뛰어넘는 결혼관과 여성관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며 그를 재조명했다.

독특한 기록 습관을 가지고 있는 존 콜리어는 마치 문화재 보관록처럼 모든 작품마다 연도 및 커미셔너, 작품 값, 재료 값 등 각종 정보와 간단한 노트를 작성해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학적인 문장들이 아니라 건조한 실험실 기록문 같았던 탓에 오히려 그가 '감흥 없는 화가' 취급을 당한 게 아니냐는 말도 있다. 오죽하면 릴리트의 작업 일지를 보면 '오늘 누드모델에게 구렁이를 두르게 하고 그렸다. 점심 식사. 오후 작업. 누드모델이 뱀에 감겨 질식하기 전에 작업을 멈췄다. 다시 그렸다. 차 한잔했다. 그리고 취침'이라고 적혀 있다. 마치 실험실의 오늘 일을 기록하는 연구자의 일기 같다. 그러나 일과의 기록만으로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존 콜리어의 이후 작품들과 그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후대 연구가들이 왜 그를 두고 '당시 남성들을 뛰어넘는 결혼관과 여성관을 가졌다'고 평가하는지 가늠할 수 있다.

존 콜리어의 추락한 아이돌. 1913년작, 오크랜드 아트 갤러리 소장

'추락한 아이돌' 그림으로 남성 유리한 이혼법도 겨냥

보든 칼리지의 미술사학자 파멜라 플레처 교수가 2009년 옥스퍼드 아트 저널 32호에 기고한 글에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1913년 로열 아카데미 전시회에 출품된 존 콜리어의 '추락한 아이돌'은 전시회가 끝나고도 몇 달 동안 "둘 중에 누가 추락한 아이돌인가?"라는 추측과 논란이 이어지며 큰 화제를 모았다고 한다. 당시 영국의 일간지에서부터 타블로이드 가십지에 이르기까지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가 되자 '타임스'는 특파원을 보내 존 콜리어를 직접 인터뷰할 정도였다.

화제의 배경에는 1912년 겨울에 개정된 영국 이혼법이 있었다. 1857년에 정리된 영국의 이혼법은 지극히 남성 중심적이었다. 아내의 간통은 결혼을 끝내는 충분한 원인이었지만, 남편의 간통은 이혼 사유가 되지 못했다. 1912년에 개정된 영국 이혼법에는 여전히 이 불평등 조항이 지속돼 논란이 됐다. 존 콜리어가 작품을 발표했던 1913년 당시, 영국 상류층 사회에서는 여성이 외도를 한 후 이혼을 요구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는 여론이 컸고, 중산층 이하 서민들 사이에서는 누가 어떤 일로 이혼하는지 가십과 소문 그 자체에 관심이 컸다고 한다.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존 콜리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추락한 아이돌은 울고 있는 여인이다. 중년의 남편에게 무언가를 고백하고 있는 젊은 아내다. 남편은 고루한 학구적인 사람으로 아마도 젊은 아내를 잘 돌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 남자는 그 순간에 떠올렸을 것이다. 나의 잘못이 아닐까 우려했을 것이다. 나는 그가 아내를 용서할 것으로 상상했다." 파멜라 플레처 교수는 "이후에 존 콜리어가 지인들과 대화한 기록을 보면 그가 이 작품을 통해 여성들의 편에서 당시의 이혼법 논란에 의도적으로 개입했음을 알 수 있다"고 분석했다.

시대 초월적인 그의 이런 여성관이 첫 부인의 여동생과 재혼한, 나이 어린 두 번째 아내와의 경험 탓인지, 학구적인 집안에서 성장했던 자신과 자기 주변 여인들에 대한 공감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존 콜리어가 남긴 다른 노트에서 '나는 종교가 필요 없이 윤리만으로 가능한 세상을 꿈꾼다 (…) 사람들이 성경의 문구 그대로를 믿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기록했던 대목으로 추측해 보자면 그는 장인이었던 진화론자 토마스 헉슬리와 비슷한 공감대를 가졌던, 상당히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존 콜리어의 레이디 고디바. 1894년작. 허버트 미술관 (코벤트리) 소장

스스로를 긍정하는 당당한 여성을 그리다

가장 널리 알려진 존 콜리어의 대표작 '레이디 고디바'는 11세기 영국 코벤트리 지역의 레오프릭 백작 부인 일화를 그린 것이다. 남편의 지나친 과세 정책에 반대하며 주민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고디바 부인의 행동은 ‘일반적 관행이나 상식, 불의한 힘의 역학에 불응하고 대담한 역의 논리로 난관을 뚫고 나가는 정치’를 일컫는 용어인 '고다이버이즘'으로 남겨졌다. 남편이 농담처럼 했던 "만약 당신이 알몸으로 동네 한 바퀴 돌고 오면 관세를 내려주지!"라는 요구를 저항의 의미로 실천했던 이 여인의 모습은 현재 벨기에 초콜릿 '고디바'의 로고가 되었다.

'릴리트'와 '레이디 고디바' 그리고 '추락한 아이돌'에 이르기까지, 존 콜리어가 그려낸 여성들은 '순종적인 이브'보다는 '저항하는 릴리트'를 닮았다. 남편인 영주의 지나친 과세 정책에 반대하며 알몸 시위를 감행했던 레이디 고디바처럼, 무엇인가를 고백하고 늙은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젊은 아내처럼, 자기 존재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강인하고 당당한 여성, 이것이 최초의 여성 릴리트가 가진 진짜 모습이 아닐까?

송주영 미술교육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