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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남북] ‘수리남’과 ‘시커먼스’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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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콘텐츠 세계 사랑 받을수록 他者의 상처 세심히 살펴야

이제 좀 세계 인정 받는다고 남의 나라 막 대할 권리는 없다

조선일보

'제임스 본드' 피어스 브로스넌이 할리 베리와 함께 출연한 '007 어나더 데이(Die Another Day)'. /20세기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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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말, 우리 네티즌들 사이에서 ‘007 영화 안 보기 운동’이 벌어졌다. 표적은 당대의 인기 배우 피어스 브로스넌이 제임스 본드로 나온 ‘007 어나더 데이’. 007 영화 사상 최고 제작비를 들여 화제를 모았지만, 한국인의 분노는 다른 곳을 향했다. ‘한반도 풍경을 농부가 물소를 몰고 지나가는 식으로 동남아보다 낙후된 곳처럼 묘사했고, 비무장 지대에서 미군이 작전을 벌일 때 한국군은 아무 역할도 못하는 등 주권국 군대답게 묘사하지 않았다’(본지 2002년 12월 3일 자 사회면 보도)는 게 분노의 이유였다.

영화 속 007은 예비군 군복을 입고 북한에 잠입한다. 길가에 늘어선 장승엔 ‘늙은 사람’이라고 쓰여 있다. 지금 보면 헛웃음만 나는 문화적 무지다. 하지만 그해 축구 한·일 월드컵에서 4강에 오르며 한껏 자부심이 고조된 우리는 할리우드 상업영화 속 곁가지 장면조차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불교계는 불상이 있는 곳에서의 정사 장면을 삭제하라고 요구했다. 북한 노동신문까지 나서 “조선 민족을 멸시하는 내용”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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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어나더 데이' 장면들. 영화 막바지 물소와 농부가 있는 농지 풍경, '청천 1동대'라고 쓰여 있는 군복을 입고 잠입한 007 일행, 태양열 무기 공격으로 불타오르는 휴전선.(위 사진부터) /20세기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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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한국 드라마 ‘수리남’이 좋은 흥행 성적을 거뒀다. 공식 집계 주간 순위에서 비영어 시리즈 1위에도 한 차례 오르며 지난주까지 전 세계 누적 시청 시간만 1억1069만 시간이다. 제작 과정에서 마찰을 우려해 해외 제목이 ‘나르코-세인츠(Narco-Saints)’로 바뀌었지만, 수리남 정부 장관이 “마약 국가로 묘사한 데 대해 법적 대응하겠다”고 했다. 더 중요한 건 K콘텐츠가 세계의 주목을 받을수록, 그 속에 묘사되는 현지 사회와 현지인을 존중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아닐까.

드라마 ‘수리남’에선 정권을 쥔 독재자가 ‘한국 국립박물관에서 빼온 이순신 장군의 칼과 자개장’이라는 말에 넘어가 모조품을 대통령궁에 진열한다. 평범한 한국 민간인이 ‘삼성전자 남미 판매권을 갖고 있다’고 해도 별 의심 없다. 현지인은 중국과 한국 마약 갱단의 총격전 사이에 이리저리 떼로 쫓겨 다닌다. 현지 남자들은 뇌물로 달러나 욕심 내는 군인·경찰이고, 현지 여자들은 한인 마약왕의 궁궐에서 벗은 몸으로 교태를 부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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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수리남'에서 한인 마약왕 일행과 대치하는 차이나타운의 중국인 마약 갱단.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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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수리남이 마약 관련 혐의를 벗지 못했다는 증거가 있다는 건 핑계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한 나라와 국민을 인격 없는, 극적 재미를 위한 배경 취급 할 권리는 생기지 않는다. 우리에게도 한때 ‘007 영화 안 보기 운동’을 하던 올챙이 시절이 있었다.

1980년대 말 KBS 대표 코미디 프로그램 ‘쇼 비디오 자키’에 ‘시커먼스’라는 코너가 있었다. 개그맨 두 명이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나와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표정을 지으며 대사를 던지면, 그게 인종차별인 줄도 모르고 온 국민이 함께 웃었다. 수리남을 만든 윤종빈 감독은 논란에 대해 “특정 국가나 단체의 명예가 표현의 자유와 상충될 수 있어 무척 고민했다”면서도 “실화에 바탕한 이야기여서 가상 국가로 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고 했다. 국내에서만 볼 드라마였다면 그래도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이제 우리도 어엿한 문화 강국 대우를 받는다.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해외 유명인만 만나면 ‘두 유 노 김치?’를 반복해 묻던 촌스러움도 지난 얘기다. 하지만 K콘텐츠에 대한 세계인의 사랑은 당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다. 문화 상품도 수출해야 먹고 사는 나라에서, 다른 나라와 국민의 입장과 상처를 보듬는 마음은 이제 필수다.

우리가 조금 더 잘살게 됐다고, 이제야 우리 문화가 조금 더 인정받게 됐다고, 함부로 취급해도 괜찮은 나라나 민족은 없다.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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