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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언어로 글 쓰는 여자들 [삶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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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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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처럼.

몹시 짙은 어둠 속에서 꽤 길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올 때의 일이다. 무릎이 안 좋은 탓에 정면으로 계단을 내려오기 힘든 나는, 몸을 옆으로 하고 바깥쪽 팔로 크게 원을 그리며 바깥쪽 다리를 뒤로 뻗는 방식으로 한 칸 한 칸 내려와야 했다. 부지불식간에 '체처럼' 하고 중얼거렸다. 손에 든 휴대폰의 플래시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작게 출렁였다. 리듬을 탄다고 느꼈다, 체처럼.

"체의 왼다리는 안쪽으로 휘어져 있었고 오른다리보다 길이가 짧았다. 가만히 서 있으면 왼쪽으로 몸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는데 체는 걷거나 뛸 때 그 기울기로 작은 웨이브를 그리며 움직였다. 나아가는 쪽을 향해 어깨와 팔로 곡선을 그리고, 조금 짧은 다리가 그 선과 대칭돼 타원을 그리는. 그 동작을 반복하면서 체는 일정한 리듬으로 걸었다. 체가 걷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녀의 귀에만 들리는 음악이 그녀 주변에 흐르는 듯했다. 다른 사람과 함께 걸을 때도 체는 상대의 속도에 맞추려 애쓰지 않았다. 자기의 리듬대로 발을 뻗고 어깨와 팔로 타원을 그리며 나아갔다."

김멜라의 '나뭇잎이 마르고'의 '체'라는 인물이 며칠째 내내 일상을 동행했다. 장애-퀴어-여성 체의 정체성이 여러모로 강렬한 정동을 불러일으켰지만, 내게는 체의 저 걷는 모습이 가장 정동적이었다. 저 걷기에는 많은 것이 함께 움직이고 있다. 주관적인 독서를 계속하자면, 사랑하는 여성에게 결혼하자고 말하는 체, 자식들에게 더 이상 부담 주기 싫으니 그만 죽어야겠다고 곡기를 끊는 할머니 곁에서 같이 굶는 체, 그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 보고 싶으시다니 내려오지 않겠냐고 그 사랑했던/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하는 체를 나는 저 걷기에서 본다.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동시적 발화다. 오래전부터 죽음을 사랑 못지않게 귀히 여겼던 나는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저 동시적 발화가 꼭 체의 장애를 가진 몸, 퀴어의 몸 때문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체는 단일하게 자존감/자긍심이 크지도, 단일하게 지적이거나 취향이 높지도, 단일하게 비극적이지도 않다. 젊은 작가의 장애-퀴어-여성의 복합적 형상화가 놀랍다.

'유명' 남성 국내외 작가들의 문장을 탐독하며 문학을 배운 나는 '여성' 혹은 '젠더들'의 존재를 깨닫고 나서부터 늘 그게 억울했고 싫었다. 내 문화 감수성에서 결코 분리해 떼어낼 수 없는 그 오염된 혼종성에 두고두고 빚을 갚는 심정으로 거슬러 읽기와 다른 텍스트 찾아 읽기를 해왔는데, 요즘 젊은 여성 작가들 덕분에 이 일에 즐거움과 보람이 겹겹이다. 게다가 '스물한 살짜리를 유혹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에요'라는 말을 멋이랍시고 내뱉는 '프랑스풍 좌파 지식인' 남성의 나르시시즘과 상투성, 젠더폭력을 깨알같이 촘촘한 인용문의 모자이크로 되비춰주니 그 예민한 비판 능력에 감탄이 절로 난다.

"나는 아무 힘이 없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 사람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라고 말했어, 그런 상태를 오래도록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제일 고귀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전하영,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런 문장과 현실이 서로 미러링하며 남성/성을 우쭈쭈 하던 시절은 지나갔다. 여성들은 이제 '무엇으로' '무엇인' 존재를 사랑하며, 그 사랑을 다른(queer) 언어로 기록하며, 새로운 문화사를 쓰고 있다. 이해력이나 감응력에 젠더 차이가 있어 신당역 사건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만, 그것까지 포함해 새로운 삶의, 사랑의 진화다.
한국일보

김영옥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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