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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구본영 칼럼] 리더의 한마디가 역사를 바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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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뉴스

4일은 '10·4 선언' 15주년이다. 2007년 이날 노무현 대통령이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다. 남북은 2000년 김대중·김정일 회담을 첫머리로 모두 5차례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매번 화려했던 합의문은 늘 공수표로 끝났다. 북핵 해결도 회담의 단골 메뉴였지만, 단 한 번도 이행되지 않았다.

문재인·김정은 간 3차례 회담도 마찬가지였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얼마 전 자신의 작품인 9·19 군사합의 4주년을 맞아 윤석열 정부를 겨냥했다. "정부가 바뀌어도 남북 간 합의는 이행돼야 한다"면서. 그러나 과녁이 빗나간 메시지였다. 그 직전에 김정은 정권이 핵 선제공격을 법제화하는 등 합의를 확실히 사문화시켰으니….

2018년 9월 김정은이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가 최근 공개됐다. 그 속엔 "향후 문 대통령이 아니라 각하와 직접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논의하길 바란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트럼프가 러브레터로 부른 서한을 보낸 시점은 문·김이 '9·19 공동선언'을 발표한 이틀 뒤였다. 김정은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긴밀히 협력하기로 했다"라고 해놓고 문 전 대통령의 뒤통수를 친 격이다.

4년 전 평양 능라도 경기장. 동원된 15만 군중 앞에서 문 대통령은 스스로를 "남쪽 대통령"으로 낮추며 "평양의 놀라운 발전상을 보았다"라고 했다. 이는 대화 상대를 배려하는 수사라 치자. 하지만 "어려운 시절에도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며 일어서고자 하는 불굴의 용기를 보았다"라는 대목이 배를 곯고 있는 북 주민들에게 무슨 위안이 됐겠나. 핵도, 세습독재도 포기할 의사가 없던 김정은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겠지만.

이후 남북 관계의 본질은 그대로였다. 문 전 대통령이 "진실 되고, 경제를 위해 핵무기를 포기할 것으로 믿는다"라고 했던 김정은은 최근 본심을 드러냈다. "절대로 비핵화란 없으며 그 어떤 협상도, 맞바꿀 흥정물도 없다"면서. 문 전 대통령의 공허한 연설이 잠시 환심을 샀을진 모르나, 북의 실질적 변화를 전혀 이끌어내진 못한 꼴이다.

이와 달리 지도자의 영감 어린 한마디가 역사의 변곡점을 만든 사례는 적잖다. 1987년 독일의 베를린 장벽 앞에서 행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연설이 대표적이다.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향해 "고르바초프 서기장, 이 벽을 허무시오!"라고 던진 그의 '돌직구'는 동서냉전 해체의 신호탄이 됐다.

앞서 1963년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동독 정권과 소련의 봉쇄 위협에 떨던 서베를린 시민들 앞에서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라고 외쳤다. 이 연설은 베를린 장벽 너머 동독 주민들에게도 큰 울림을 줘 독일 통일의 씨앗이 됐다.

윤석열 대통령의 유엔 방문 후 '이전투구 정국'이 그래서 딱해 보인다. 통찰력 있는 외교적 수사로 국격을 높이긴커녕 비속어 사용 시비를 부른 윤 대통령의 무신경은 당연히 비판받아야 한다. 다만 '자막 조작' 의혹을 받고 있는 영상녹취 보도를 근거로 대뜸 미국 의회를 비난했다며 악의적 '외교 참사' 프레임을 씌우고 있는 야당도 용렬해 보인다. 해당 녹취록은 전문가들도 해독이 불가능할 정도인 데다 전후 맥락상 우리 국회를 겨냥했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면 말이다.

kby777@fnnews.com 구본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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