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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김명수 대법원 5년…사법관료화 대못 뽑았지만 신뢰회복 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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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수 대법원 5년, 그리고 남은 1년

법원행정처 폐지·법관 증원 미완

법관 외부평가제·판결문 공개 확대도 숙제


한겨레

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난달 15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으로 출근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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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첫해인 2017년 9월 임명된 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난달 25일 취임 5주년을 맞았다. “저의 취임은 그 자체로 사법부 변화와 개혁을 상징한다”며 강도 높은 사법개혁을 예고했지만, 그에 맞는 리더십과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윤석열 대통령 임기 동안 대법관 14명 중 13명 교체를 통한 ‘사법부 보수화’ 가능성이 점쳐지는 상황에서 김명수 대법원의 5년과 남은 1년 과제를 짚어봤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전임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 남용으로 폭발한 ‘제왕적 대법원장’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임기를 시작했다. 대법원장 1인에게 법관 인사 등 사법행정권한이 집중되면서 판사들이 대법원장 눈치를 보는 등 사법 관료화가 심해졌고, 핵심 가치인 재판 독립성까지 훼손됐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었다. 기대에 못 미친 5년이라는 평가가 많지만 큰 변화를 불러온 상징적 개혁 조처도 있다. 윤석열 정부 들어 ‘과거로의 회귀’를 위한 보수진영의 개혁 흔들기도 노골화하고 있다.

■ 고법부장 승진제 폐지 성과


김 대법원장은 취임사에서 ‘개혁’이라는 단어를 9번이나 쓸 정도로 법원의 낡은 제도와 관행을 타파하겠다고 공언했다. 2020년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도’ 폐지가 대표적이다. 고등부장 승진제도란 대법원장이 지방법원 부장판사 중 일부를 선발해 고등부장으로 보임했던 제도다. 법원장이나 대법관 후보군에 오르기 위해선 우선 치열한 경쟁을 뚫고 고등부장부터 돼야 했다. 법원 내부에서는 고등부장 승진제가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해야 하는 법관들을 대법원장이 가진 인사권으로 줄세우며 눈치 보게 만든다는 비판이 꾸준히 나왔다.

승진제도가 사라진 뒤 지방법원 부장판사 경력의 판사들이 고등법원 판사로 부임해 2심 재판을 담당하고 있다. 고등부장이 돌아가며 맡던 법원장 인사도 일선 판사들이 추천한 후보군 중에서 대법원장이 임명하는 ‘법원장 후보 추천제’(2019년 첫 도입)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김 대법원장은 임기 마지막 해인 내년까지 전국 21개 지방법원 모두에 추천제를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3천명에 달하는 전국 법관을 한 줄로 세워 평가하던 사법 관료화 대못을 뽑는데는 일단 성공한 셈이다.

법원 내부에서는 고등부장 승진제 폐지로 “법관들이 보다 소신을 갖고 판결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고 평가한다. 20년 이상 경력의 한 고위법관은 “고등부장 승진제도가 있었던 때엔 대법원장이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부장에 고등부장 승진 후보군을 몰아넣고 경쟁을 시켰다. 부장들뿐 아니라 배석판사들까지 자기 부장의 승진과 자신의 인사평정을 위해 몸을 갈아넣으며 사건처리에 매달렸던 시기다. 평판사까지 인사권자의 눈치를 보게 만든 제도라 폐지 자체로 의미가 크다고 본다”고 했다. 또 다른 판사는 “승진을 미끼로 대법원장이 부장판사부터 평판사까지 손쉽게 통제했던 제도가 폐지되면서 판사들이 독립적으로 고민해서 판단할 여지가 생겼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명한 오석준 대법관 후보자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재판 지연 이유로 고등부장 승진제 폐지와 법원장 추천제를 꼽았다. ‘승진제도가 사라지면서 판사들이 일을 안 한다’는 논리다. 법관들은 사법서비스 차원에서 재판 지연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 있지만, 이는 사법시스템 개혁, 법관 외부평가제 등 인사평정 방식 개선, 판사 증원 등을 통해 해결할 문제이지 ‘법관 도로 줄세우기’가 해법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 물 건너간 법원행정처 폐지


고등부장 승진제 폐지를 제외하곤 사법행정 개혁 성과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시급한 과제로 꼽히는 판사 증원은 국민 동의를 얻거나 국회를 설득하는데 실패했다. 지난해 말 법관 임용 시 필요한 최소 경력을 낮춰 판사 수급을 원활히 한다는 취지의 법원조직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법조일원화 후퇴’라는 거센 비판 속에 국회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한 판사는 “법관도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예전처럼 일에만 몰두하지 않게 된 측면이 있다. 문제는 사건 적체로 인한 부작용이 예상되는 만큼 법관 증원을 이뤄냈어야 하는데, 국회 설득에 실패하면서 개혁이 반쪽짜리에 그쳤다”고 했다. 또 다른 판사는 “법관 부족이 계속되면 국민 피해로 돌아갈 수밖에 없음에도 지난 5년간 대법원장이 판사 증원에 대한 국민 동의도 얻지 못한 것 같다”고 했다.

국민 동의를 얻지 못한 데는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에 대한 미흡한 후속 조처가 한 원인으로 꼽힌다. ‘사법농단’ 연루 판사들에 대한 징계가 더디게 진행되면서 일부는 징계시효(3년)를 넘겼고, 일부는 법복을 벗고 대형 로펌에서 고액 급여를 받는 변호사가 됐다. 가뜩이나 떨어진 사법 신뢰를 회복할 기회를 스스로 차 버렸다는 비판이 나왔다.

김 대법원장이 임기 초 약속했던 법원행정처 폐지도 임기가 1년 남은 상황에서 처리가 난망하다. 엘리트 법관 코스로 인식되는 법원행정처 조직과 기능은 사법행정권 남용의 주요 통로가 됐다. 폐지할 경우 사법행정권한을 넘겨받을 사법행정기구 구성에 법관-비법관 비율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두고 법원과 국회가 샅바싸움을 하면서 논의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한 판사는 “김 대법원장 과제는 사법농단 사태가 다시는 벌어지지 않도록 시스템을 만들고 대법원장 역할과 위상을 재정립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법원과 국회를 설득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들은 눈치만 본다는 느낌이다. 남은 1년 동안에도 근본적 변화는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 상고제도 바꿀 수 있을까


법관 사회 수평화를 위한 밑돌을 놓은 만큼, 김 대법원장이 강조하는 “좋은 재판”을 위해 국민들이 사법서비스 변화를 체감할 수 있는 후속 작업이 속도를 내야한다.

남은 임기 1년 주요 과제로는 주권자인 국민에게 법관 평가 권한을 일부 돌리는 법관 외부평가제 도입, 판결문 공개 범위 대폭 확대 등이 꼽힌다. 또다른 고위법관은 “양승태 대법원에 대한 반성의 결과로 김명수 대법원이 시작된 만큼, 법관 독립성 보장과 법관 사회 수평화는 사법개혁의 큰 기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윤석열 정부 들어 사법부 보수화가 예상되지만 그 개혁 방향 자체를 반대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사법부 숙원 과제인 상고제도 개선 작업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대법원은 6년에 걸쳐 대법관 4명을 증원하고 ‘상고심사제’를 도입한다는 내용의 상고심 개선 방안을 최근 내놨다. 상고심사제란 대법원에 올라온 사건 중 법으로 정한 요건을 충족하는 사건만 본안판단으로 넘기고, 나머지 사건은 상고기각으로 종결하는 제도다. 대법관 1인당 연간 4천건의 사건을 담당하는 살인적 업무량을 줄이고 보다 중요한 사건 심리에 집중하겠다는 취지다. 대법관 증원 및 상고심사제를 도입하려면 법원조직법 등이 개정돼야 한다. 김 대법원장에게는 국민과 국회를 설득할 수 있는 시간이 1년도 채 남지 않았다. 여론이 움직이려면 사법부 먼저 뼈를 깎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쉽지 않다. 고위법관은 “법관사회가 주권자에 의한 외부평가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이 안타깝다”고 사법부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신민정 기자 shin@hani.co.kr

진일보한 판결들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 ‘일 강제동원 피해배상’

문재인 정부에서 틀이 잡힌 ‘김명수 대법원’ 구성은 과거사·소수자·노동 관련 판결에서 비교적 진보적 모습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장기미제로 남아 있는 주요 사건 판단을 미루지 말고 최고법원으로서 책임감을 보여줘야한다는 요구가 크다.

■ 다른 나라 법원 같은 판결들


우선 노동사건에서는 “양승태 대법원과 비교하면 다른 나라 법원 같다”(권오성 성신여대 지식산업법학과 교수)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진보적 판결이 잇따랐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20년 9월 박근혜 정부 시절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 대한 ‘법외노조’ 처분은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3권에 대한 본질적 제약”이라며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2018년 6월 학습지 교사의 근로자 지위를 인정해 노조를 결성할 권리가 있다고 본 대법원 판단도 노동계가 주목한 판결이다. 권오성 교수는 “전교조 판결은 시행령만 가지고 위법하게 운영된 법외노조 통보제도가 위법임을 확인한 사건이고, 학습지 교사 판결은 노동조합법의 적용 범위를 획기적으로 확대했다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시대 변화에 발맞춰 소수자 권리 보장으로 나아간 판결도 여럿 내놓았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8년 11월 종교·신념을 이유로 집총을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처벌해선 안 된다고 판례를 변경했다. 지난 4월엔 부대 밖에서 합의에 따라 이뤄진 동성 군인 간 성관계에 대해 “사적 공간에서의 성적 자기결정적을 제한하는 것”이라며 처벌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양승태 대법원 시절 재판거래 의혹을 받았던 사건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도 김명수 대법원의 역할이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8년 10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씨 등이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 재상고심에서 피해자들에게 1억원씩을 배상하라고 한 판결이 대표적이다. 이 판단으로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 의하더라도 손해배상청구권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법리가 확정됐다. 지난 8월 유신정권의 긴급조치 9호 피해자에 대한 국가배상 판결 역시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판례를 7년 만에 뒤집은 사례다.

■ 뒤로 밀린 정의


주요 미제 사건에 대한 판단은 시급한 숙제다. 쌍용차와 경찰이 정리해고 반대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 67명을 상대로 낸 29억원 상당의 손해배상소송은 2016년 대법원에 올라온 뒤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소송 장기화 압박으로 조합원들은 집단 트라우마 진단을 받기도 했다. 구순의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국내자산 현금화 집행 판단도 계속 미뤄지고 있다.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대법원에 올라간 지 오래된 사건들에 대해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다는 건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외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대법관 다양성 유지해야


그럼에도 상당수 전향적 판결들이 나온 배경에는 대법관 구성 다양화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임명한 13명의 대법관 구성은 다채롭다. 여성(박정화·민유숙·노정희·오경미), 비서울대(조재연·박정화·안철상·노정희·이동원·노태악), 재야 변호사(김선수) 등 고위 법관 출신 ‘서오남’(서울대 출신 50대 남성) 일색이었던 획일적 대법관 구성이 크게 바뀌었다.

윤석열 정부 들어 보수성향의 오석준 후보자를 대통령에게 제청한 김 대법원장은, 남은 임기 1년 동안 조재연·박정화 대법관 후임자를 윤석열 대통령에게 제청하게 된다. 대법관 구성 다양화라는 김명수 대법원의 유산을 끝까지 관철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온다. 임지봉 교수는 “대법관 구성이 다양해야 소수의견도 나오고, 소수의견이 활발히 개진돼야 대법원이 사회변화를 담아내게 된다”고 말했다.

신민정 기자 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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