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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단독] 지난해 정시 이과 상위 30개 학과 중 '非의학' 딱 1개...수재들이 의대에만 몰린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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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22학년도 대교협 어디가 정시 결과 분석
수능·IMF 외환위기 거치며 의대 쏠림 심화
소득상위 10개 직업 중 의사가 9개...고용시장 바꿔야
한국일보

지난 해 10월 2일 서대문구 연세대학교에서 2022학년도 수시모집 논술시험을 마친 수험생들이 캠퍼스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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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2023학년도 전국 대학 수시모집이 마감되면서 본격적인 입시철이 시작됐다. 자연계열 최고 경쟁률 학과는 예상대로 의예과. 인하대 의예과 논술전형으로 9명 모집에 5,835명이 지원, 648.3대 1을 기록했다. 올해 전국 의대‧치대‧한의대‧수의대‧약대 수시모집 평균 경쟁률은 33.1대 1로, 상위 10개 대학 학과 경쟁률은 모두 수백 대 1에 달했다.

경쟁률만 높은 게 아니다. 올해 초 각 대학들이 공개한 2022학년도 정시 합격자 통계를 보면, 전국 34개 의대 중 서울대 의예과 다음으로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이 높은 컴퓨터공학부(국어, 수학, 탐구2 상위 70% 기준, 292.5점)보다 성적이 높은 의대가 22개에 달한다. 강원대 의대, 충북대 의대는 서울대 컴퓨터공학과와 백분위 점수가 같았다. 최상위권 수험생 중 의대 공부가 정말 적성에 맞지 않는 한, 웬만해서는 의대부터 지원한다는 뜻이다.

이과 수재들의 의대행이 공식처럼 여겨지지만 수험들의 학부모, 진학상담 교사들은 입버릇처럼 말한다. "내가 학생 때는 의대 인기가 이 정도로 심하지 않았다." 정말 그럴까. 지난 수십 년간 보도한 한국일보 대입 기사, 종로학원의 대학 지원 배치표, 3년 전부터 공개한 대학들의 정시 입시 결과를 분석해봤다.

70, 80년대 이과 최상위 학과는 물리학·이공계

한국일보

1970, 80년대 이과 최상위권 학과는 물리학, 전자공학과 같은 이공계, 의예과였다. 당시 서울대 전체 또는 자연계 수석 입학생은 물리학을 많이 선택했다. 1970, 71, 72학년도 서울대 전체 수석입학생이었던 임지순 포스텍 석좌교수, 오세정 서울대 총장, 한태숙 KAIST 명예교수. 한국일보 자료사진·KAIST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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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12월 29일 본보가 대학과 입시업계 자료를 취합해 보도한 지원기준표에서 자연계 최상위 대학은 서울대 전자공학(학력고사 312점 이상), 서울대 전산기공‧의예과(307점), 서울대 제어계측‧기계공학‧물리학(302점) 순이었다. 연세대 의예과 지원가능 점수는 서울대 산업공학과와 비슷한 297~301점, 고려대‧가톨릭대 의예과 지원가능 점수는 283~292점이었다. 순위로 치면 각각 9번째, 20~30번째인 셈이다. 부산대‧경북대 의대 지원가능 점수는 서울대 식품공학‧천문학과와 비슷한 273점~ 282점이었다. 35~50번째 높은 순위다. 당시 대학은 학력고사 성적과 내신을 합산해 신입생을 뽑았는데 의대보다 서울대를 선호했고, 서울대에서도 최상위 학과는 이공계였다.

1990년 종로학원이 모의고사 결과, 지원 희망대학 등을 토대로 발표한 대입배치표도 비슷하다. 당시 4년제 대학 자연계 학과 합격자 성적 순위를 보면 서울대 물리학, 컴퓨터공학, 의예, 전자공학, 미생물학 순이다. 상위 20개 학과 중 서울대를 제외한 학과는 연세대 의예(12위), 딱 하나뿐이다.

수능·IMF 겪으며 의대 쏠림 본격화

한국일보

7월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 6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종로학원 2023 대입 수시전략 설명회'에서 수험생 학부모들이 입시전문가의 설명을 들으며 자료를 보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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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과 수재들의 의대 쏠림 현상이 시작된 건 1990년대다. 1994학년도부터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도입되면서 전기대‧후기대 구분이 사라지고 대학과 학과를 함께 지원하도록 입시체계가 바뀌면서 상위권 수험생들의 의대 지원이 늘었다. 여기에 1997년 겨울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대기업 이공계 연구소가 구조조정에 들어가면서 의대 쏠림이 가속화됐다. 이은경 전북대 교수는 논문 '이공계 기피 논의를 통해 본 한국과학기술자 사회'에서 "IMF 위기 이전에 과학기술자들은 사회 보상 측면에서는 미흡하지만 상대적으로 직업안정성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그 믿음이 깨진 것"이라고 지적한다.

실제 종로학원의 1995년, 2000년 대학 배치표를 보면 자연계 상위 20개 학과 중 의대‧치대‧한의대‧약대가 10개, 13개에 달한다. 한국 경제의 부침 속에도 의대 인기는 20년간 지속을 넘어 가속화됐다. 대학이 입시결과를 발표하지 않았던 2005년, 종로학원이 내놓은 대학 배치표에서 자연계 상위 20개 학과 전부를 의대‧치대‧한의대‧약대가 차지했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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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20위권 내 학과 전부 '의대·치대·한의대'

한국일보

2020년 10월 29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의료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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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들이 입시결과를 공개한 최근에는 쏠림이 더 심화됐다. 30일 종로학원이 2022학년도 정시 합격자 통계를 분석한 결과,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 상위 20위권(국어, 수학, 탐구2 백분위 70% 커트라인 발표 대학 기준, 일부 학과 과목별 가중치 반영) 학과는 전부 의학계열이었다. 의대가 16개, 한의대와 치의대가 각각 2개였다. 30위권으로 넓히면 서울대 컴퓨터공학과(30위)가 의학계열 외 유일한 학과였다. 50위권으로 넓혀도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35위), 수리과학부(39위), 물리학전공(44위), 화학부(44위)를 제외한 45개 학과가 전부 의대, 치대, 한의대 등 의학계열이었다. 3년 전인 2020학년도 20위권 안에 서울대 컴퓨터공학부(5위), 수리과학부(9위) 등이 포함됐었는데 그나마 후순위로 밀린 셈이다.

문정복 더불어민주당 의원 자료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서울대 자퇴생은 약 3배(2012년 120명⟶2021년 330명) 늘었는데, 자퇴생 84.2%가 이공계열인 반면 의약학계열은 0.8%(16명)에 그쳐 이런 심증에 힘을 보태고 있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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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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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연봉랭킹 7위였던 의사...2020년 10위권 내 9개가 의사


최상위권 인재들이 단지 고용불안 때문에 의대를 고집하는 걸까.

올해 7월 보건복지부가 의대 쏠림 '가속화' 현상을 설명할 만한 자료를 발표했다. 복지부,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공공데이터로 보건의료인 201만 명의 소득을 분석한 '보건의료인력 실태조사'로 2020년 기준 국내 의사 평균 연봉은 2억3,070만 원이었다.

눈여겨볼 지점은 연봉의 '상승 속도'다. 2010~20년 연평균 의사 소득 인상률은 5.2%상용근로자 100인 이상 사업장의 임금인상률(최근 5년간 연평균 3.6%), 공무원 보수 인상률(5년간 연평균 1.9%)을 압도했다. 복지부는 그나마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창궐로 의료 이용이 줄어 그해 의사 소득이 전년 대비 2.3% 줄어든 결과라고 설명했다.

고용노동부 산하 한국고용정보원, 그 전신인 중앙고용정보원이 2000년대 초반부터 국내 직업의 소득 순위를 발표한 결과도 흥미롭다. 중앙고용정보원이 전국 5만 표본가구를 조사해 2005년 발표한 직업지도에 따르면, 당시 월평균 수입이 높은 직업은 기업 고위임원(CEO), 금융및 보험 관련 관리자, 정보통신 관련 관리자, 변호사, 항공기 조종사, 경영지원 관리자 순이었다. 의사는 7위에 그쳤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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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대 개편된 한국고용정보원은 돌연 직업별 연봉 순위를 매기면서 의사를 전공별로 나눠 조사한다. 2011년 11월 국내 100개 직업 재직자 6,000명을 분석한 '한국직업정보시스템 재직자 조사'에서 성형외과 의사는 도선사, 국회의원, 기업 고위임원에 이어 연봉 순위 4위를 기록했다. 치과의사(7위), 외과의사(8위), 피부과의사(10위)를 비롯해 임금 높은 직업 30개 중 의사는 13개에 달했다(치과의사, 한의사, 의대교수 포함).

고용정보원이 올해 4월 발표한 '2020 한국 직업 정보 보고서'에 따르면, 소득 상위 10개 직업 중 기업 고위임원(8위)을 제외하고 나머지를 모두 의사가 차지했다. 이비인후과, 성형외과, 피부과, 외과, 안과, 산부인과, 정신과, 비뇨기과, 내과 순이다. 11~20위 사이 직업 중 항공기조종사(12위), 대학총장(14위), 금융관리자(17위)를 제외한 7개 직업이 의사, 한의사, 치과의사였다. 고소득으로 분류되는 변호사는 21위를 기록했다.

의사 소득 고공행진.... 입시·노동시장 바꿔야

한국일보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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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소득이 급속도로 늘어난 이유는 뭘까. 의사 수는 적은데 국민 의료이용 건수는 전 세계적으로 많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우리나라 인구 1,000명당 임상 의사 수는 2.5명(한의사 포함),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인 3.7명에 한참 못 미친다. 반면 국민 1인당 외래진료 횟수는 연간 14.7회로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많았다. OECD 평균(5.9회)의 2.5배 수준이다. 진료수가는 낮지만 1인당 진료 횟수가 많아 고수익이 보장되는 셈이다. 특히 최근 수년간 국민건강보험 보장성이 급속히 강화되면서 의사들의 근무시간, 보수가 동반 상승했다.

이 때문에 최상위권 수험생들의 의대 쏠림을 막기 위해 대입제도, 고용시장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요셉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전공선택의 관점에서 본 대졸 노동시장 미스매치와 개선방향' 보고서에서 "자연이나 공학 계열의 적성을 가지고 있고 이를 통해 사회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는 학생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소득 때문에 의대를 선택하는 현상 등이 나타날 수 있다. 대학 신입생 대상 설문조사 결과에서 실제로 확인된다"며 "여러 가지 이유로 정부에서 직접 통제하고 있는 보건 같은 특수 전공의 경우 해당 분야 전문가와 함께 사회 전반적인 시각에서 정원의 적절성을 정기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고령화와 함께 수요 확대가 예상되는 의료 분야의 경우 증원이 필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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