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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韓 전기차 피해’ 美와 통상 분쟁 각오한다더니…산업부 담당자는 5개월째 공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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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 의회가 한국산 전기차 판매에 불리한 내용이 담긴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통과시켰다. 자동차가 우리나라의 주력 수출 품목인 만큼 정부 고위 관료는 물론 윤석열 대통령까지 나서서 IRA 시행에 관한 국내 우려를 미국에 전달했다. 정부는 우선 미국과 적극 대화하고, 진척이 없으면 최후의 수단으로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도 고려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WTO 제소까지 갈 경우 최전방에서 IRA의 빈틈을 파악하고 논리 싸움을 벌여야 할 산업통상자원부 통상분쟁대응과장 자리가 5개월째 공석으로 방치돼 있다. 이 자리는 3년 전 일본을 상대로 한 수산물 수입 규제 분쟁에서 한국의 역전승을 이끌어낸 주역이 올해 5월 사표를 낸 뒤 지금까지 비어있다. 글로벌 통상 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관련 인력 관리에 신경을 더 써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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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9월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을 접견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윤 대통령은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 시행에 대한 한국 측 우려를 해리스 부통령에게 전달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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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 영입’ 통상분쟁대응과장, 5개월째 공석

3일 정부에 따르면 산업부는 통상교섭본부 내 통상분쟁대응과장 자리를 다섯 달째 비워두고 있다. 미국 변호사인 정하늘 전 과장이 2018년 4월부터 4년 동안 일하고 지난 5월 사표를 낸 뒤부터다. 정 전 과장이 퇴사할 당시 정부 관계자는 “2개월 정도면 후임자를 뽑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5개월가량 지난 지금까지 후임자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산업부 통상분쟁대응과장은 인사혁신처에서 경력 개방형 직위로 지정해 민간인만 지원할 수 있다. 정 전 과장도 법무법인 세종에서 일하다가 공모를 통해 산업부 직원이 된 케이스다. 정부 관계자는 “인사혁신처 공모 절차를 거쳐 현재 (정 전 과장의) 후임자 선정 작업을 거의 마친 상태”라며 “외부 영입이다 보니 여러 방면에서 검증할 게 많아 예상보다 선발이 늦어졌다”고 했다.

차기 통상분쟁대응과장이 누구인지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는 전임자인 정 전 과장이 미국·일본과 맞붙은 대형 무역 분쟁에서 한국의 연승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특히 2019년 4월 일본산 수산물·식품 수입 규제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WTO 분쟁에서 우리나라의 역전승을 따낸 게 큰 화제를 모았다. 당시 WTO는 일본이 “한국의 일본산 수산물 수입 규제는 부당하다”며 제소한 사건의 최종심에서 1심 판결을 뒤집고 한국 승소를 선언했다. WTO가 식품 관련 분쟁에서 피소국 손을 들어준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 성과를 인정받은 정 전 과장은 2020년 12월 4급 서기관에서 3급 부이사관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일반 공무원이 서기관에서 부이사관으로 승진하려면 통상 10년 가량 걸리는데, 정 전 과장은 2년 반 만에 해낸 것이다. 전 부처를 통틀어 개방형 직위 공무원이 승진한 사례도 정 전 과장이 처음이었다.

올해 초 한국산 세탁기에 관한 미국의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 조치를 두고 한국과 미국이 맞붙은 분쟁에서 한국의 승리를 이끈 주역도 정 전 과장이었다. WTO는 미국의 수입 물량 증가 분석이 논리적·적정성 측면에서 부실하다는 한국 정부의 주장을 인정했다. 정 전 과장은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다”며 지난 5월 사표를 내고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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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급변하는 통상 질서… “핵심인력 확보 대책 필요”

최근 국제 통상 질서는 ‘세계화의 종말’이란 표현이 과하지 않을 정도로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이후 심화한 공급망 차질과 각국의 자국 보호주의 행보, 자원 패권화 경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이 새로운 지역 경제(블록)를 탄생시키고 기존 에너지·식량 흐름에 교란을 일으키는 양상이다.

미국의 경우 중국을 노골적으로 배제하며 “미국이 설계한 새로운 판에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신(新)통상 패러다임 전환 속도가 빠른 만큼 통상 주무부처인 산업부도 인력 관리에 더욱 신경 써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한국 정부로선 미국과 관계 유지에 신경을 쓰는 한편 IRA의 불합리함을 논리적으로 파고들 전문가를 하루빨리 확보해야 하는 셈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이달 16일(현지시각) 서명한 IRA는 미국에서 제조되지 않거나 중국산 광물·배터리를 사용한 전기차에 세액공제 혜택을 제공하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대 아이오닉5, 기아 EV6 등 미국에서 판매 중인 한국산 전기차 5개 모델이 7500달러(약 1000만원)의 세액공제 대상에서 제외됐다.

내년부터는 배터리 광물 조달 비율과 배터리 부품 조달 비율이 적용된다. IRA에 따르면 2023년 1월 1일부터는 친환경차가 북미에서 최종 조립(기본 조건)되고, 리튬·코발트 등 광물을 미국 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국가에서 최소 40% 이상 조달해야 하며, 배터리 부품도 절반 이상을 북미산으로 채워야 한다. 이 세 가지 조건 모두를 충족해야 7500달러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다. 광물 조건은 2027년 80%, 배터리 부품 조건은 2029년 100%로 상향 조정된다.

산업부 출신인 한 원로는 “미국이 중국 견제를 위해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를 출범시키는 등 국제 통상 환경이 급박하게 변하고 있다”며 “핵심 인력 충원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

세종=전준범 기자(bbeom@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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