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한국 대통령 연설에 한국 현실이 없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자유’ 21번 강조한 첫 유엔총회 기조연설
추상적 구호뿐… 북한 등 당면과제 실종


경향신문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9월 20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의 제77차 총회장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주간경향] “대통령님의 국정철학을 들어보니 지금 당장 유엔사무총장 하셔도 손색이 없겠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9월 2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77차 유엔총회에서 취임 후 첫 기조연설을 한 이후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윤 대통령과 면담에서 이 같은 말을 했다고 김은혜 대통령실 홍보수석이 기자들에게 밝힌 내용이다. 구테흐스 총장이 실제 이런 말을 했는지 여부와 별개로, 윤 대통령의 연설 내용이 유엔의 입장에서 듣기 좋은 말로 가득차 있었던 건 사실이다. 김 수석이 전한 말은 ‘유엔사무총장인 내가 할 말을 당신이 했다’는 취지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어 보인다.

영국·뉴욕·캐나다로 이어진 윤 대통령의 이번 해외 순방은 조문 불발과 당초 예고했던 것과 상당히 다른 한일·한미 정상회담, 그리고 비속어 발언 파문 등의 논란이 매일 터져나왔다는 점에서 거의 ‘총체적 난국’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대형 사고가 없었더라면 이번 순방에서 가장 논란이 됐을 부분은 바로 윤 대통령의 유엔총회 연설이었다.

윤 대통령은 ‘자유와 연대’라는 제목의 11분 연설에서 ‘자유’를 21번, ‘유엔’을 20번 언급했다. 그다음으로 많이 등장한 단어는 ‘국제사회’(13번), ‘연대’(8번) 등이었다. 윤 대통령의 연설은 ‘자유진영의 연대’를 강조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힘에 의한 현상 변경’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이 말은 미국이 세계패권에 도전하는 중국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싸잡아 적으로 규정할 때 쓰는 표현이다. 결국 연설 요지는 자유라는 가치를 바탕으로 미국 중심의 자유진영이 강한 연대를 통해 결집함으로써 현재 중국과 러시아의 행동을 저지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윤 대통령은 연설에서 북한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한국이 유엔회원국이 된 이후 지금까지 30년 동안 대통령의 유엔총회 연설에서 북한을 언급하지 않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북한 문제를 매번 강조했던 문재인 정부와 달리 북한보다 더 큰 문제를 고민하는 ‘글로벌 중추국가’임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까지 나왔다.

한국 대통령의 자격으로 유엔총회 연단에 선 윤 대통령의 연설로 적절한 것이었는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한 국가의 대표로 참석하는 유엔총회 연설은 그 나라가 필요로 하는 구체적 행동을 제시하는 자리이지 정치철학 설파의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의 연설은 자유와 가치 연대와 같은 추상적 구호에 머물 게 아니라 한국의 당면과제이자 사활적 문제인 북한 비핵화와 동북아시아의 평화에 대한 한국 대통령의 비전을 제시하고 유엔회원국들의 적극 협력을 강조했어야 한다.

더욱이 미중 전략경쟁과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유엔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지고 북한·러시아의 노골적인 핵위협에도 유엔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비등해지는 상황이다. 핵확산금지조약(NPT) 검토회의에서 결과문서조차 채택하지 못해 위기에 빠진 국제비확산체제의 영향이 한국에 고스란히 미치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 대통령의 이 같은 연설 내용은 너무 한가하고 공허하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다자외교에 정통한 전직 관료 출신의 한 외교전문가는 이번 윤 대통령의 연설을 두고 “다른 나라 대통령들의 연설과 비교해보면 한국 대통령의 연설이 왜 부적절하고 미흡한지 한눈에 알 수 있을 것”이라며 “이번 총회의 주제가 ‘분수령의 순간(watershed moment)’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보다 적극적으로 한국의 현실을 국제사회에 각인시키고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촉구했어야 했다”고 비판했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simon@kyunghyang.com

▶ 백래시의 소음에서 ‘반 걸음’ 여성들의 이야기 공간
▶ ‘눈에 띄는 경제’와 함께 경제 상식을 레벨 업 해보세요!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