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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어머니 그림자 극복하고 영국 통합의 구심점 될까 [세계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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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 ‘찰스3세 국왕시대’ 막 올라

왕세자 시절 정치성 스스럼없이 드러내

정치개입 경계한 엘리자베스와 비교돼

고위층에 보낸 사적편지 공개로 곤혹도

여왕 타계 후 힘 실리는 ‘군주제 폐지론’

스코틀랜드 독립국가로 EU 가입 태세

뉴질랜드 총리도 ‘공화국 전환’ 언급

최근 찰스 호감도 상승에 그나마 안도

경기침체 속 연합왕국 수호 당면 과제

1000년 역사 왕실 존속도 찰스 어깨에

“목요일에 중요한 투표가 있죠?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 정말 신중하게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2014년 9월 스코틀랜드 애버딘셔 밸모럴성의 교회 앞에서 만난 여성에게 말했다. 이 발언은 여왕의 70년 재위 기간(1952∼2022) 중 가장 정치적인 발언이었다. 여왕은 생전 언론 인터뷰는 단 한 차례, 그것도 자신의 대관식에 관한 내용으로 한정할 정도로 정치적 개입을 회피했다.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찬반 주민투표(9월18일)를 나흘 앞두고 정치적으로 예민한 상황에서 나온 이 발언도 사실 자의라기보다는 정부 요청에 따른 것이었음이 훗날 드러났다. 당시 총리였던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는 2019년 BBC 인터뷰에서 분리독립 찬성 지지율이 더 높다는 여론조사 결과에 충격을 받아 여왕 비서에게 ‘눈썹을 치켜세우는 정도’의 표현을 여왕이 해줬으면 한다는 부탁을 했다고 털어놨다. 버킹엄궁 측은 헌정 문제와 관련해 여왕과 나눈 대화가 공개되자 불쾌감, 당혹감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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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3세.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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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중립 다짐한 찰스 3세

이제 군주제의 존속, 연합왕국(United Kingdom)의 통합, 영연방(Commonwealth)의 향방과 관련한 영국 왕의 과업은 찰스 3세 신(新)국왕의 어깨 위에 놓였다.

입헌군주제의 영국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왕에게 부여된 법률동의권, 의회해산권, 총리해임권 등의 권한도 오직 선출된 정부의 조언과 요청에 따라서만 행사된다. 찰스 국왕이 이런 철칙에 따라 정치적 중립을 확고히 유지한 선왕과 같은 길을 걸을 수 있을지 물음표가 붙는다. 왕세자 때부터 400여개 단체의 회장이나 후원자로 왕성한 활동을 하며 기후변화, 대체의학, 유기농법 등 여러 사안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기 때문이다.

1997∼2007년 재임한 당시 토니 블레어 총리 등 정부 고위직에게 보낸 서한 27통이 2015년 공개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손으로 갈겨쓴 필체가 거미를 연상시켜 ‘흑거미 편지’라고 불리는 서한에서 찰스는 이라크 전장의 노후화된 장비 문제를 지적하거나, 농민을 상대로 한 대형 슈퍼마켓의 횡포를 단속하는 자리에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앉혀달라고 요청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왕실은 정책 결정의 직접적 권한은 없지만, 군주의 아주 작은 몸짓도 논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편지는 미래의 국왕이 본인 관심사와 관련해 장관들을 계속 압박할 것이라는 우려를 불러일으켰다”고 전했다. 찰스는 최근 난민 신청자를 르완다로 보내 현지에서 수속을 밟도록 한 정책에 대해선 끔찍하다는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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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국왕과 리즈 트러스 새 총리가 의견 차로 사사건건 대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대표적으로 환경 문제가 거론된다. 찰스는 1970년부터 관심을 가진 환경 문제와 관련해 지난해 11월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 참석해 “문자 그대로 시간이 촉박하다”며 기후변화에 대한 전시(戰時)적 대응을 갖출 것을 강조했다. 반면 트러스 총리는 환경부담금 과세 중단을 공언했고 기후변화 회의론자인 제이컵 리스모그를 사업·에너지·산업 장관에 지명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트러스 총리는 국가가 국민의 삶에서 한발 물러서야 한다고 믿지만, 찰스가 만든 프린스트러스트(The Prince’s Trust)는 청년 실업자를 돕는 개입주의 조직”이라고 지적했다. 찰스가 1976년 해군 퇴직수당을 시드머니로 설립한 프린스트러스트는 지금까지 빈곤지역 청년 약 90만명에게 도움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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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도 본인에 대한 우려를 잘 아는 것으로 보인다. 2018년 BBC 인터뷰에서 “왕위에 올랐을 때도 (왕세자 시절과) 같은 행동을 하리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얘기”라며 왕위에 오르면 ‘헌법적 제한’에 따라야 하며 각료들과 합의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대중 캠페인 활동을 지속할 것이냐는 질문에는 “나는 그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지난 9일 즉위 후 첫 대국민 연설에서도 “여왕께서 헌신하신 것처럼 나도 신이 내게 부여한 시간 동안 나라의 중심에서 헌법적 원칙을 지킬 것을 엄숙히 서약한다”고 밝혔다. 이어 “내가 아끼는 자선단체와 이슈에 더는 시간과 에너지를 쏟을 수 없다”며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넘길 것이라고 했다. 윌리엄 왕세자를 염두에 둔 발언이라고 외신들은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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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일(현지시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즉위 70주년을 축하하는 플래티넘 주빌리(Platinum Jubilee) 축제를 앞두고 영국 국기 유니언잭이 걸린 런던 버킹엄궁 앞 거리에 사람 물결이 가득하다. 런던=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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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왕국 수호 등 과제 산적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로 구성된 연합왕국, 영국의 통합을 유지하는 것도 찰스가 직면한 커다란 과제 중 하나다. 2020년 말 마무리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가 영국 내 원심력을 자극한 상황이어서 더욱 그렇다. 일단 스코틀랜드가 영국을 떠나 독립국가로서 EU에 들어가겠다는 태세다. 니컬라 스터전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수반은 지난 6월 2023년 10월 제2차 분리독립 찬반 주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북아일랜드 문제는 브렉시트 논의 과정 내내 뜨거운 감자였다. EU 회원국 아일랜드와 영국령 북아일랜드 사이에 물리적 국경이 다시 만들어졌다. 이는 두 지역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한 벨파스트 협정(1998)을 위협한다. 결국 EU와 영국은 북아일랜드를 EU 단일시장에 남겨두는 북아일랜드 협약을 체결했지만, 트러스 총리는 협약 파기를 주장하고 있다. 최근 북아일랜드 인구조사에서 가톨릭교도 비율(45.7%)이 개신교도(43.5%)에 처음으로 앞선 것도 부담이다.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와 정체성이 더 가까워졌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미국 온라인 매체 복스는 “군주제는 전통적으로 영국성(Britishness)이라는 유대관계를 강화하는 역할을 해왔다. 모든 영국인의 공통분모 중 하나가 바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었다”며 “이제 질문은 찰스가 선왕과 비슷한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느냐로 모아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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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포트다운=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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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연방과 왕실의 미래는

찰스 3세는 영연방 56개국의 수장이기도 하다. 캐나다·호주·뉴질랜드 등 14개국은 아직도 영국 국왕을 국가원수로 규정한다. 문제는 여왕의 타계를 계기로 영연방 결속이 느슨해지고 공화제 전환 움직임에 탄력이 붙을 가능성이 커졌다는 점이다. 카리브해의 섬나라 바베이도스가 지난해 이미 선출직 대통령을 국가원수로 삼는 개헌안을 처리해 영국 왕실과 결별한 가운데 인접 국가 앤티가바부다는 여왕 사후 사흘 만에 “3년 내 공화국 전환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는 “뉴질랜드가 공화국으로 전환하는 일이 내 생애 중 반드시 일어나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영국 왕실에 새겨진 식민주의, 노예무역의 유산과 결별하는 것도 난해한 문제다. 찰스는 지난 6월 르완다에서 열린 영연방 정상회의에서 “나는 노예제의 오래 지속되는 영향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면서 그토록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한 데 대해 개인적인 슬픔의 깊이를 이루 다 말할 수 없다”며 “우리가 모든 시민에 유익한 공통의 미래를 만들려면 우리의 과거를 시인하는 새로운 길을 발견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1066년 정복왕 윌리엄 1세의 대관식 이후로 1000년 역사를 가진 군주제가 존속하려면 왕실 개혁, 현대화에도 힘써야 한다. 가디언 왕실담당기자 출신인 스티븐 베이츠는 이와 관련해 상속·법인세 납부, 방만한 왕실 간소화, 버킹엄궁 개방 확대, 대영제국 훈장 개명 및 개혁 등을 제안했다.

영국 왕실 입장에서 다행인 것은 여론조사기관 유고브가 여왕 타계 직후 실시한 조사에서 “찰스는 좋은 왕이 될 것”이라는 응답이 63%까지 상승하는 등 지지가 모이고 있다는 점이다. 직전 5월 조사(32%) 때보다 곱절로 늘어났다. 그러나 허니문이 언제까지고 이어질 수는 없다. 영국인들은 이제 여왕 추모 분위기에서 벗어나 내년 봄 또는 여름 열릴 대관식 때까지 생계비 위기, 경기 침체 우려 등의 엄혹한 현실을 마주할 것이다.

유태영 기자 anarchy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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