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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朝鮮칼럼 The Column] 국가 부도 전야, 그때도 정치 싸움이 먼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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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 위기 닥친 1997년, 정치는 막장 싸움판이었다

여당은 ‘내부 총질’ 벌이고 야당은 국정 방해에 몰두

경제는 그냥 방치했다… 그것이 亡兆였다

조선일보

'세계증시 동반 대폭락 '소식을 전하는 조선일보 1997년 10월 29일 자 1면/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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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증시 동반 대폭락, 미·일서도 투매, 달러 환율 최고 폭등.’ 요즘 뉴스처럼 보이지만 25년 전 기사 제목이다. 1997년 10월 29일 대부분 신문은 증시 대폭락 소식과 망연자실한 시민들의 표정 사진을 1면에 실었다. 충격에 대응할 힘이 없던 한국은 이후 한 달도 되지 않아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한다.

오래전 기사를 뒤진 이유는 “제2의 아시아 외환 위기가 올 수 있다”는 블룸버그의 최근 보도 때문이었다. 어쩌다 외환 위기가 닥쳐 IMF에 손 벌릴 지경이 되었는지 기억이 가물거려 당시 자료를 찾아보았다. 생각만큼 방대하진 않았다. 본격적인 위기 조짐이 보인 즈음부터 IMF에 손 벌릴 때까지 오래 안 걸렸기 때문이다.

‘국가 부도의 날’로 향하던 당시의 상황은 영화보다 더 부조리해 보였다. 아시아 증시 동반 폭락, 달러 환율 급등, 기업 연쇄 부도 등이 동시 다발적으로 터지는 와중에 정치권은 막장 싸움에만 골몰했다. 김영삼 대통령과 차기 대선 후보인 김대중 당시 야당 대표(총재)는 비자금 폭로전을 벌였다. 둘 다 아들까지 연루돼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경제 문제는 정쟁(政爭)거리 중 하나일 뿐이었다. 코스피가 5년 만에 600 아래로 내려간 날, 야당은 “이회창 (여당) 총재가 주식 시장을 방문했더니 증시가 폭락하지 않았느냐”라고 맹공했다. 발언이 비과학적인데, 여당도 비슷했다. “전날 (김대중 총재) 비자금 고발을 했는데 하필 왜 오늘 폭락해서….”

한 주 후 발생한 홍콩 증시의 폭락은 당시 외환 위기에 쐐기를 박은 결정타였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교수 시절 쓴 보고서는 순식간에 상황이 얼마나 나빠질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10월 22일 정부는 부도 상태에 처한 기아그룹을 산업은행 출자로 구제하기로 결정했다. 민간 금융기관 부도가 국가 부도 인식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바로 다음 날인 23일 홍콩 주가가 폭락하였다. 아시아 경제에 대한 신뢰는 돌이킬 수 없이 무너졌다. 24일 S&P는 한국 국가신용을 하향 조정하였고….’ 붕괴의 사흘 동안 정치권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그냥, 아무것도 안 했다.

여당은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과 당 대표(이회창)가 싸우느라 전쟁터였다. 요즘 말로 내부 총질이 한창이었다. ‘작심한 이 총재-못마땅한 YS, 일전 불사’ ‘여 주류·비주류, 같은 배 타긴 틀렸다’…. 한국 국가신용등급 하락이 구석 뉴스로 실린 날, 신문은 여당 내분 기사로 도배됐다.

여당이 정신을 못 차리면 야당이라도 “위기부터 수습하자”고 촉구해야 상식적이다. 반대였다. 여당의 분쟁을 부추기고 국정은 국회에서 사사건건 방해했다. 정치적 지지 기반인 노조 편에 서서, 위기 전부터 추진해온 노동법과 금융개혁법 개정에 발목을 잡았다. 제때 제대로 통과만 되었어도 ‘IMF 사태’를 피하거나 최소한 완화할 수 있었던 법들이었다.

1997년 초 한 달 동안 총파업을 벌여 정리해고제 등을 담았던 개정 노동법을 되돌린 노조는 ‘파업의 맛’에 본격적으로 빠졌다. 사실상 부도난 기아차는 노조가 매각을 파업으로 막았다. 한은 노조는 금융개혁법에 반대한다며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기 한 주 전, 한은 노조는 금융 시스템을 마비시키겠다고 정부를 겁박했다. 강경식 당시 경제부총리의 회고록이다. ‘중앙은행 직원들이 머리띠를 둘러매고 단식 농성을 하는 나라가 또 있는지 궁금했다. 외국 투자가나 금융기관이 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염려되었다.’

요즘 딜링룸에서는 긴급 상황 발생을 알리는 알람이 수시로 울려댄다. 시장 지표를 열어보기 겁이 날 정도로 경제가 어지럽다. 그런데 정치 뉴스 속 세상은 다른 나라만 같다. 25년 전 그 사람들처럼, 경제는 아무려면 어떠냐는 듯 소모적 정쟁을 벌인다. 윤석열 대통령의 ‘XX…바이든/날리면’ 발언을 두고 외교 참사네 아니네 한 주 넘게 여야가 싸우고 있다. 거대 야당은 이때다 싶은지 정권을 흔들어댄다. 이들이 가장 큰 힘을 쏟는 사안은 이재명 당 대표를 대장동 수사 등 ‘사법 리스크’로부터 지키는 것이다.

“펀더멘털이 나쁘지 않다.” IMF 구제 금융 이틀 전 경제부총리가 했다는 소리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9월 30일 “경제 위기 가능성은 매우 매우 낮다”고 했다. 한국 경제가 튼튼해졌기를 바란다. 하지만 우리 정치는 2년간의 팬데믹, 그 뒤에 이어지고 있는 초유의 금리 급등과 글로벌 시장 붕괴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지킬 수 있나.

25년 전 나라가 부도나기 직전까지 정치인들은 국가 경제가 아닌, 자신만을 위해 분투했다. 돌아보니 그것이 가장 큰 망조(亡兆)였다.

[김신영 경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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