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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시선] 멍청한 거래, 합리적 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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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월 결혼식을 했지만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다. 서로를 덜 사랑하거나 관계에 여지를 두고 싶어서가 아니다. 이 제도가 우리(특히 여성인 나)에게 적합하거나 유익하지 않다고 판단해서다. 이미 많은 이에게 결혼은 운명과 필수가 아닌, 선택과 기피 사항이 된 지 오래다. 그렇다고 ‘가족’을 포기한 건 아니다. 내가 원하는 대상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유대를 원할 뿐이다.

경향신문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자


그러나 국가의 생각은 많이 다른 것 같다. 여성가족부는 지난해 4월 사실혼·동거·위탁가정 등 다양한 가족 형태를 포용할 수 있도록 ‘건강가정기본법’상 가족 정의를 바꾸고, ‘건강가족’이라는 시대착오적 용어도 개정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최근 그 입장을 철회하며 현행대로 결혼과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만 가족으로 인정하겠다고 밝혔다. 한국 사회에서는 실제적으로 부부지만 법적으로는 동거 관계인 우리는 가족이 아니다. 결혼하지 않고 홀로 아이를 양육하는 나의 지인도 ‘건강가정’이 될 수 없다. ‘결혼’을 장려하는 정부의 바람대로 동성의 커플이 결혼식을 올렸지만 법적으로 부부가 될 수 없다. 사별한 후 홀로 살다가 서로를 돌보기 위해 함께 살게 된 노년의 동거인은 서로의 ‘보호자’가 될 수 없다.

결혼식을 준비하며 한국 사회는 정말 결혼에 진심이구나 절감했다. 모든 문화와 제도가 결혼과 혈연 중심 가족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결혼·출생률은 가파르게 하락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격렬하게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현상에 관해 미국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제이컵 펑크 키르케고르 선임연구원은 얼마 전 어느 인터뷰에서 “한국 여성의 결혼·출산 기회비용이 너무나 크다”고 진단하며 한국 여성에게 결혼과 출산은 매력을 잃은 “나쁜 거래(Bad deal)”라 결론지었다. 아, 국가도 몰라준 마음을 미국 남성 학자가 이렇게 간파하다니.

우리가 “나쁜 거래”를 거부할 때 정부는 신혼부부 대출과 출산장려금 등 돈으로 회유하며 결혼·출산을 장려하는 한편, 아예 제도를 더 경직시켜 그 바깥의 가족을 소외시키며 결혼·출생률을 높이려는 “멍청한 거래”를 시도하고 있다. 이런 시도에 제이컵 펑크 키르케고르 선임연구원은 단언했다. “혼자서도, 혹은 동성·비혼 커플끼리도 얼마든지 아이를 낳거나 키울 수 있어야” 하며 “성평등을 이루기 전까지 획기적 출생률 반등은 어려울 것”이라고. 가족의 형태가 더 많아지고 여성의 안전과 권리가 보장되어야 국가와 시민 사이의 “합리적 거래”가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가족’ 개념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가족을 원한다면 그 가족을 누구와,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숙고하고 선택할 권한은 당사자들에게 있다. 결혼과 혈연으로만 구성된 가족 제도는 평등한 유대와 상호 돌봄을 중심으로 재편할 필요가 있다. <가족을 구성할 권리>의 저자, 가족구성권연구소 소장 김순남은 가족을 넘어선 ‘시민적 유대’가 가능한 사회를 상상하자며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누구나 고립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가, 시민들 간의 유대가 가능하며 가족상황과 무관하게 충분하게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사회인가, 서로 의지할 수 있는 관계가 제도적으로 충분히 보장되는가?”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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