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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책꽂이]美 '평화 위한 원자력' 전략, 패권 유지에 어떻게 활용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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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원자

제이콥 햄블린 지음, 너머북스 펴냄

美 '원자력은 값싼 에너지원' 선전

중동 석유자원 확보 지렛대로 삼고

IAEA 설립해 세계 통제 수단 활용

신생 독립국들 강대국에 종속되는

신식민주의 관계 원전분야서도 반복

이란 등 핵무기 확산 부작용 초래도

서울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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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3월4일 이란 팔라비 왕조의 경제재무성 장관 후상 안사리는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서면서 ‘원자력 이란’이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몇 달 전 수도 테헤란을 방문한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이 안정적인 석유 공급을 대가로 5년간 수십억 달러 상당의 장비와 125억 달러의 규모의 민간 무역 거래를 약속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원액의 절반 가량은 이란의 민수용 핵개발 계획 발전시키는 용도였다. 언젠가 석유 고갈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원자력은 이란의 미래로 보였다.

하지만 미국의 속셈은 달랐다. 바로 석유수출국기구(OPEC) 무력화였다. 그날 아침 키신저는 대통령과 가진 회의에서 이란·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국가들이 핵기술처럼 돈이 많이 드는 사업에 투자하려면 감산은커녕 석유 생산량을 계속 늘려 미국의 에너지 안정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번역 출간된 ‘저주받은 원자’는 1950년대 이후 70년 동안 미국이 자신들의 국제 패권과 지정학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아시아·아프리카·중동·중남미 등에서 ‘평화를 위한 원자력’ 전략을 어떻게 구사해왔는지 분석한 책이다. ‘풍요한 원자’라는 약속이 실상 미국의 지구적 권력 행사를 위한 정치적 도구였다는 것이다. 특히 책은 한국과 북한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핵기술을 발전시켜 온 현실을 국제 역학관계의 맥락에서 통찰할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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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제이콥 햄블린 미국 오리건주립대 역사학과 교수다. 그는 원전을 둘러싼 다툼을 기술적인 해결책이나 동서 진영간 대립이 아니라 신식민지나 인종주의 문제와 연계해 입체적으로 들여다본다. 책 제목의 ‘저주받은’도 알제리 독립운동가이자 작가인 프란츠 파농의 유작인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The Wretched of the Earth)’에서 따왔다. 파농은 이 책에서 제국주의 국가들이 기술 이전을 통해 수백 년이 소요되는 경제적 발전을 단기간에 이룰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지만 실제 결과는 식민주의 구조 지속이라고 비판한다. 저자는 신생 독립국들이 외화를 벌기 위해 국내 천연자원을 국제시장에 헐값으로 팔고 선진 과학기술을 얻기 위해 강대국에 종속되는 신식민주의적 관계가 원자력 분야에서도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평화를 위한 원자력’ 계획의 출발은 한국전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육군참모총장 출신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재임 기간 1953~1961년) 대통령은 1952년 대선 당시 한국전쟁에서 원자폭탄 사용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원폭이 지나치게 악마화됐다고 불평했고 수소폭탄 실험에 대한 세상의 관심을 분산시키려 했다. 미 정부는 핵 기술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풍요의 뿔 ‘코누코피아’로 보이도록 선전했다.

“원자와 함께 라면 자연이 가하는 제약을 극복할 수 있고, 자연의 맥박은 빨라질 수 있으며, 자연에서 오는 재앙을 극복할 수 있다.” 미 정부와 과학계는 원자력이 환경오염을 일으키지 않는 값싼 에너지원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핵분열 부산물로 나오는 방사선을 쬐면 해충과 세균을 사멸시켜 주요 식품의 유통기한을 늘리고 밀과 쌀의 고단백 변이종의 만들어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다고 과장했다. 생태계, 비료, 인체의 신진대사를 연구하는데도 방사선은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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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이니셔티브의 내용이 모호하고 과학적 근거가 빈약한 신기루에 불과했지만 선전전의 효과는 컸다. 특히 새로 독립해 경제가 취약했던 개발도상국들은 미국의 원전 이전 약속에 매달렸다. 미국은 1560~60년대에는 방사선 동위원소를, 1970년대 이후에는 원자로나 핵기술을 가지고 각국의 핵무기 프로그램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 원자력 원료인 우라늄과 토륨 시장을 장악했고 석유 자원 확보에도 원전 기술을 지렛대로 활용했다. 반면 저개발국가들은 국가 기반시설의 주요 부분을 미국과 유럽의 전문성·장비·연료에 의존하며 새로운 형태의 기술 종속에 직면했다.

또 미국은 ‘평화적인 원자력 공유’라는 이름 아래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설립해 세계 통제 수단으로 활용했다. 원자력 상용 기술에 접근하려는 나라들은 IAEA의 엄격한 사찰과 감시를 받아야 했다. 미국은 이라크가 핵무기 개발 계획을 숨겼다는 이유로 전쟁까지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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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미국은 민수용이라 하더라도 몇몇 우방 외에는 원전 기술을 이전할 의지가 없었다. 한국의 경우 1950년대 물리학자인 박철재 등 과학자들을 미국으로 보냈지만 접근할 수 있는 시설은 대학의 연구용 원자로에 그쳤다. 그나마 한국은 미국이 공산주의 확산에 대응해 ‘개발 국가의 본보기’로 삼아 각종 지원에 나선 덕분이었다. 한국은 미국의 시간 끌기 등 우여곡절 끝에 1978년 고리원전을 가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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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평화를 위한 원자력’이라는 레토릭을 패권 유지에 활용한 미국의 이중적인 전략은 핵무기 확산이라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많은 나라들이 민수용·군사용 핵개발 계획을 주권과 힘의 상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또 평화적 핵기술이라는 것은 결국 잠재적인 핵무기 개발 기술이기도 했다. 북한을 비롯해 인도·파키스탄·이스라엘·이란 등은 경제와 평화를 빌미로 핵무기를 개발하고 대내적인 국민 통합과 외교적·군사적 시위 수단으로 삼고 있다.

저자는 “지구적 핵질서는 가난한 국가들을 부상시키는 대신 식민지기를 떠올리게 하는 방향으로 구조화된 것처럼 보인다”며 “평화적 원자라는 약속을 미국이 주도하며 다른 수많은 국가를 포함한 정부들이 분명히 활용하고 오용하며 착취했다”고 비판한다. 3만원.

최형욱 기자 choihu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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