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29 (금)

"법원, 왜 이러나…노사 합의 무시해 혼란만 조장"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노동3대 학회 공동 정책 토론회

중앙일보

″노동시장 이대로는 안 된다″ 노동3대 학회 토론회가 29일 서울 로얄호텔에서 열렸다. [사진=한국고용노사관계학회]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고용과 노동시장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일제히 법원을 성토했다. 노동시장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인 노사자율을 훼손하고, 사법적으로 재단하면서 산업현장의 혼란을 부추기는 주범으로 떠올랐다는 것이다. 이에 앞서 이기권 전 고용노동부 장관은 중앙일보와 인터뷰(8월 9일 자)에서 "통상임금 판결로 대기업 정규직의 임금만 올라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더 심화시켰다"고 비판한 바 있다.

학자들은 또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근본 원인은 정규직 과보호와 연공형 임금체계"라며, 디지털 시대에 맞게 노동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해만 바뀌면 오르는 연공급 임금체계를 성과와 직무 중심으로 바꿀 것을 주문했다. 근로시간도 근로자의 권리 개념으로 재정립해 근로자가 자율적으로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한국고용노사관계학회, 노동경제학회, 노동법학회 등 노동 3대 학회는 29일 '디지털 시대, 일하는 방식의 새로운 모색'을 주제로 공동 토론회를 열고 이런 의견을 제시했다. 이날 토론회는 노동개혁을 위한 정부 내 전문가 모임인 미래노동시장연구회가 학계 의견 수렴을 위해 주관했다.

◇"법원 판결, 혼란 부채질…노사 자율 존중해야"

이날 토론회에서 학자들은 법원의 노동시장 관련 판결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발제자로 나선 권오성 성신여대 법학과 교수는 "임금은 근로의 대가성이라는 표지 하나만으로 판단해야 한다"며 "지급의무의 확정, 정기적·계속적 지급과 같은 기준으로 임금을 판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꼬집었다. 대법원이 통상임금의 요건으로 정기성·일률성·고정성이란 기준을 제시한 데 대한 비판이다. 권 교수는 "시간급, 주급, 월급이라는 용어에는 그 자체에 정기성과 일률성이라는 개념이 내재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통상임금은 근로자가 소정 근로시간을 '만근'할 것을 가정하고 사전에 미리 정한 것"이라며 "따라서 판례가 말하는 고정성은 통상임금의 금액을 구체적인 실근로 여부에 종속시켰다는 점에서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전도된 논리에 불과하다"고 통박했다.

또 다른 발제자로 나선 김희성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통상임금과 같은 임금을 둘러싼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결 등이 일관성이 없고 실무와 동떨어져 큰 혼선을 초래하고 있다"며 "경영성과급의 임금성에 대해서도 법원이 서로 모순된 판단을 하면서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토론자로 나선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획일적 기준으로 당사자의 자율적 결정을 무효화하는 것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며 "노사합의가 있다면 그 합의가 우선한다는 점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노동시장에서의 노사 자율 우선의 원칙을 강조한 것이다.

배규식 전 한국노동연구원장도 "노사의 자율적 해결 영역과 여지를 키우는 것이 노사관계의 본령"이라며 "노사관계의 왜곡된 사법화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MZ세대, 호봉제의 불공정성에 불만"

김희성 교수는 "근속 연수에 따라 임금이 (자동으로) 올라가는 것은 초고령 사회로 가는 상황에 안 맞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특히 "연공급이 젊은 층의 노동시장 진입도 어렵게 한다"고 지적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임금을 많이 받게 되면 결국 기업의 인건비 부담이 고령층으로 쏠리고, 젊은 층의 채용 기회를 줄이게 된다는 의미다. 따라서 임금체계를 연공급(호봉제)에서 직무·성과제로 개편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지순 교수는 "MZ세대가 노조 조직화에 나서는 것은 연공서열 방식의 임금체계의 불합리성에 저항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성과를 얼마나 냈는지, 직무의 난이도가 어떤지에 따라 임금이 결정되어야 하는데, 업무실적과 관계없이 나이만 많으면 많은 월급을 받는 것에 대해 MZ세대는 불공정하다고 본다는 얘기다. 박 교수는 "연공서열 방식의 임금체계는 고용 경직성과 함께 고비용 구조의 원인"이라며 "그 결과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정규직 축소, 비정규직 증가, 원하청 구조 확대 등)를 확산 심화시키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인사관리의 경직성을 완화하고 직무와 성과 및 직업능력에 기초한 보상체계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앙일보

노동3대 학회가 29일 토론회를 열고 노동시장 개혁 방안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 [사진=한국고용노사관계학회]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근로시간, 근로자가 결정할 수 있어야"

김희성 교수는 "1950년대 공장 근로시대에 제정된 현행 근로시간제도는 획일적이어서 개별적이고 다양한 지식 근로를 규제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1일 근로시간 상한을 폐지하고, 대신 근로자의 건강권 확보를 위해 근무일 간 연속 휴식시간을 보장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박지순 교수는 "디지털 전환으로 시간적·공간적 유연성이 대폭 확대돼 근무시간과 업무공간의 해체가 촉진될 것"이라며 "스마트 기기 등으로 시간과 공간적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일하는 문화를 지원하는 근로시간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선택적 근로시간제 정산기간을 현행 1개월에서 1년 이내로 과감하게 확대하고, 1주 12시간인 연장근로시간도 월, 분기 또는 연간 단위 총량제로 변경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예컨대 월 50시간, 연간 600시간으로 연장 근로시간의 총량을 정하고, 개발 및 수요가 집중되는 시기 또는 특별한 사정이 발생했을 때는 연장근로를 자율적으로 집중 활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근무시간과 근로형태의 선택권(근로자의 자기결정권)을 확대해 근로자 입장에서는 일과 생활의 조화를 최적화하고, 기업에는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여 경쟁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방안"이라는 것이 박 교수의 분석이다.

◇"하청업체 독자 사업권 보장해야"

하청업체 근로자의 근로조건 보장을 두고는 의견이 갈렸다. 권오성 교수는 초기업별 교섭이나 단체협약의 효력을 확장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하청 근로자와 대기업 원청이 단체교섭을 하거나 원청 정규직에 적용되는 단체협약을 하청 근로자에게도 적용하자는 얘기다.

이에 반해 김희성 교수는 "원·하청 공동노사협의회를 통해 원청이 하청의 복리후생이나 사내 질서 규율 등을 공동으로 하는 것은 '위장 도급'의 불법파견을 허용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하청업체 사용자가 경영자로서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은 물론 사업 자체를 유지하고 영위할 권리를 박탈해 강제로 원청 기업에 예속시키는 행위"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오히려 하청업체의 독자적인 사업권을 보장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완할 것"을 제안하면서 "도급 계약의 불공정 거래 등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 하청업체 근로자의 근로조건이 보호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박지순 교수는 "근로자 파견의 엄격한 제한과 비현실적 구별 기준으로 인한 불법파견 문제가 지속해서 발생하고 있다"며 "파견법의 경우 파견대상 업무를 제조업까지 포함해 과감하게 확대하고, 동일직무에는 동일임금을 기본원칙으로 정립해 임금 수준을 보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문재인 정부의 비정규직 제로 정책은 사실상 비정규직 문제를 정치적 도구화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wolsu@joongang.co.kr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