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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여학생들 성추행한 그놈…상가냐, 아파트냐에 처벌 갈렸다 왜 [그법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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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법알 사건번호 92] 몰래 따라가 성추행, 주거침입도 처벌하려면?…아파트·상가, 판단 갈렸다



지난해 4월, 남성 A씨는 PC방에서 어느 여학생을 몰래 촬영하고 자위행위까지 합니다. 이 여학생이 PC방을 나설 때 뒤따라가 아파트 1층 계단에서 강제추행도 저질렀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같은 날 밤에는 한 상가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다른 여학생을 몰래 촬영하고 강제추행했습니다. 다음 날에도 비슷한 범행은 이어졌습니다. 귀가하는 여학생을 뒤따라가 아파트 1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강제추행한 겁니다. 게다가 A씨는 성인 음란물 사이트에서 다른 사람이 찍은 불법 촬영물까지 다운로드 받아 소지하기도 했습니다.

A씨로부터 강제추행을 당한 피해자만 해도 3명. 모두 어린 여학생이었습니다. 추행을 당한 뒤 무서워 도망치는 피해자를 붙잡기도 하는 등 A씨의 범행은 심각했습니다.

A씨에게 적용된 혐의는 ▶성폭력처벌법 주거침입강제추행 ▶성폭력처벌법 카메라등 이용촬영 및 반포 ▶성폭력처벌법 카메라등 이용촬영물 소지 ▶공연음란으로 총 4가지였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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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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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1심 재판부는 4개 혐의 모두 유죄로 보고 징역 3년 8개월을 선고했습니다. 어린 피해자들이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는 점, 건전한 성적 가치관 형성에도 막대한 지장이 초래됐을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고려했죠.

그런데 A씨는 항소하면서 이런 주장을 합니다. 4가지 혐의 중 '주거침입 강제추행'은 아니라는 겁니다.



관련 법령은?



성폭력처벌법 제3조 제1항에 따르면, 주거나 건조물에 침입한 사람이 강제추행을 저지른 경우에는 무기징역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합니다. 원래 하한선이 '5년 이상'이던 것이 2020년 법이 개정되면서 '7년 이상'으로 바뀌었습니다. '주거침입 강제추행'은 더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반영된 겁니다.

A씨의 경우 아파트 현관이나 상가 건물 1층에서 추행을 저질렀으니, 성폭력처벌법 위반(주거침입 강제추행)이 된 것이지요.

A씨는 비교적 형이 무거운 이 법이 적용되는 것을 피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항소심에서 "강제추행은 맞지만 주거·건조물 침입은 아니다"라는 논리를 폈죠. 상가 1층이나 아파트 1층은 모두 '공개된 장소'이니 주거나 건조물을 침입한 것은 아니라면서요.

결국 쟁점은 A씨가 상가 1층에 들어간 것이 '건조물침입'인지, 또 아파트 1층 계단과 엘리베이터 앞 공간에 들어간 것이 '주거 침입'인지 여부입니다. 이게 인정돼야 '주거침입 강제추행'이 인정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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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현관. ※기사와 관련 없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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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심 판단은?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주거침입이나 건조물침입인지 따질 때는 거주자나 건물 관리자의 '사실상의 평온'을 해쳤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2심 재판부는 주거침입과 건조물침입이 모두 맞는다고 봤습니다. 아파트 1층 계단이나 엘리베이터 앞 공간 역시 '주거'에 해당한다는 겁니다. 우리 법에서 말하는 '주거'는 단순히 가옥 자체만을 뜻하는 게 아니고, 공용 복도 등도 포함됩니다. 거주자들의 '주거의 평온'을 보호할 필요성이 인정되기 때문입니다.

재판부는 또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되는 상가라도 범죄를 저지를 목적으로 들어갔다면 건조물 침입이 인정된다"는 2007년 대법원 판례를 들었습니다. 만약 건물에 들어오는 사람이 범죄를 저지를 것을 미리 알았다면, 건물 관리자가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재판부는 A씨가 불법촬영과 강제추행을 위해 상가에 들어갔으니, 건조물 침입이 맞는다고 했습니다. 건물이 개방된 시간에, 출입문을 통해 들어갔다고 해도 '침입'이라는 거죠.



대법원 판단은?



2심의 '모두 유죄' 판단은 대법원에서 일부 뒤집혔습니다. 대법원 2부(주심 조재연 대법관)는 원심 판결을 파기해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고 29일 밝혔습니다. 쟁점은 '상가 1층'이었습니다.

지난 3월 나온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의 영향이 컸습니다. 당시 전합은 "상가 등 영업장소에 범죄 목적으로 들어갔다고 해도 바로 침입으로 인정할 수는 없고, 출입 당시 상황을 고려해 '사실상의 평온 상태'가 깨졌는지 판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영업주 승낙을 받아 통상적인 출입방법으로 들어갔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침입에 해당하지 않는다"라고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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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난 3월 24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전원합의체 선고에서 대법관들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날 대법원은 음식점에서 상대방과의 대화를 녹음·녹화하기 위해 식당 주인 몰래 장치를 설치·제거한 행위가 주거침입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발생한 '초원복집 사건'에서 도청장치를 설치할 목적으로 손님을 가장해 음식점에 들어갈 경우 주거침입죄가 성립한다고 판단했는데, 25년만에 판례를 바꾼 것이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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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심 재판부가 A씨 사건을 심리할 때는 이 전합 판결이 나오기 전이어서 '범죄 목적'에 초점을 뒀었는데, 상고심에서는 전합 취지를 따라 '사실상의 평온 상태'를 주목한 겁니다.

대법원은 A씨가 열린 출입문을 통해 통상적인 방법으로 상가에 들어갔고, 출입 당시 모습 등을 비춰봤을 때 건물 관리자의 '사실상의 평온상태'가 침해됐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범죄 목적 출입이긴 하지만, 건물의 형태와 용도·성질, 외부인에 대한 출입 관리 방식, 출입 경위와 방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침입'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겁니다.

반면 아파트 1층 계단과 엘리베이터 앞 공간에 들어간 것은 '주거침입'이 맞는다고 했습니다. 아파트 공동 현관에는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CCTV가 설치된 점 등을 고려하면 외부인의 자유로운 출입이 허용되는 공간도 아니고요. A씨에게도 아파트 거주자들 몰래 현관에 들어간다는 의도가 있었다고 봤습니다. 무엇보다 A씨의 범행은 피해자들을 비롯한 아파트 거주자들의 '사실상의 평온'을 해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한편 A씨는 2심 재판 도중 자신에게 적용된 법조항에 대해서도 문제를 삼았습니다.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 심판을 제청해달라고 재판부에 신청한 건데요. "상가처럼 일반적으로 출입이 허용된 장소에 들어가 강제추행을 한 사람에 대해서는, 성폭법 위반(주거침입 강제추행)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입니다.

사실상 법원의 해석에 대해 헌재가 제한을 걸어 달라는 건데, 대법원은 법령의 해석·적용 권한은 헌재가 아닌 법원에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A씨처럼 '법원의 해석'이 위헌이라고 주장하는 위헌심판 제청 신청을 받아들일 수가 없죠.

2심 재판부는 위헌법률 심판 제청 신청을 기각했습니다. 법정형이 지나치게 가혹해 조항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 그법알

‘그 법’을 콕 집어 알려드립니다. 어려워서 다가가기 힘든 법률 세상을 우리 생활 주변의 사건 이야기로 알기 쉽게 풀어드립니다. 함께 고민해 볼만한 법적 쟁점과 사회 변화로 달라지는 새로운 법률 해석도 발 빠르게 전달하겠습니다.

오효정 기자 oh.hyo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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