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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동서남북] ‘이생집망’ 세대 울리는 전세 사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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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인 전세금 8월에만 1000억원

실상은 정부 통계보다 더 심각

피해자 넷 중 셋은 30대 이하

악질 임대인 가혹하게 처벌해야

수없이 발품을 팔면서 전세 매물의 등기부등본을 꼼꼼히 살폈다. 융자가 낀 집은 거르고, 권리 관계가 복잡한 다가구 주택도 피했다. 마음에 드는 집을 찾아 계약하고, 이사 당일 전입신고를 하고 확정일자를 받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압류장이 날아왔다. 집주인은 “빚 몇 천만원에 집을 날리겠느냐”며 큰소리를 쳤지만, 6개월 뒤 집은 경매에 넘겨졌다. 압류 전 확정일자를 받은 덕분에 전세금은 지킬 수 있겠다고 안심했는데, 집주인이 억대의 세금을 체납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국세 체납액은 세입자의 전세금보다 선(先)순위 채권이다. 결국 보증금의 절반 정도가 날아갔다.

조선일보

28일 서울 강서구 대한상공회의소 내 위치한 전세피해 지원센터에서 한 시민이 전세(사기) 피해 접수 관련 대한법률구조공단의 상담을 받고 있다. 2022.9.28/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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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라이터이자 시인·만화가인 홍인혜 작가가 ‘루나의 전세 역전’이라는 웹툰에서 소개한 자신의 전세 사기 체험담이다. 깨끗한 등기부등본을 믿고 계약했는데, 미리 알 길이 없는 집주인의 체납 세금 때문에 ‘피 같은’ 전세금을 날렸다. 그는 전세금을 온전히 돌려받을 수 있을지 고민하던 때를 ‘칼날 위를 걷는 듯 불안한 낮과, 압정 위에 누운 듯 괴로운 밤의 연속’이라고 표현했다. 독자들은 “(만화) 보는 나도 숨이 막힌다” “공포 영화보다 더 소름 돋는다”며 공감했다. 댓글에는 전세금을 둘러싼 기막히고도 고통스러운 사기 체험 사례가 줄줄이 올라왔다.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전세 보증금을 날리고, 살던 집에서 언제 나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이런 지옥 같은 생활을 겪는 무주택 세입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지난달에만 전국에서 전세금을 제때 돌려받지 못한 사고가 511건 발생했다. 월 단위로는 처음으로 사고 금액(1089억원)이 1000억원을 넘었다. 2017년 이후 올해까지 집계된 전세금 사고액은 2조원을 웃돈다.

‘보증금 떼먹는 집주인이 이렇게 많나’ 놀랄 만하지만, 사실은 빙산의 일각이다. 이는 국토부 산하기관인 HUG(주택도시보증공사)의 전세금반환보증에 가입한 세입자만 대상으로 조사한 통계다. 전체 전세 시장에서 보증금 보험에 가입하는 세입자는 20%가 채 되지 않는다. 실제 전세 사기 피해 규모는 정부 발표보다 몇 배 더 크다는 뜻이다.

전세 사기는 빌라 세입자에게 집중되는데, 피해자 상당수가 청년층이라는 게 심각한 문제다. HUG는 3번 이상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는 사고를 내고도 돈 갚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집주인을 ‘악성 임대인’으로 관리한다. 2020년부터 올해 7월까지 악성 임대인 203명이 떼먹은 전세금이 7824억원인데, 20~30대 세입자의 피해 금액이 5805억원(74.2%)으로 집계됐다. 전세 사기 피해자 4명 중 3명이 넉넉지 않은 자금 사정 때문에 저렴한 빌라 전세를 찾는 사회 초년생, 신혼부부, 대학생이라는 것이다. 무섭게 뛴 집값에 ‘이생집망’(이번 생에 집 사기는 망했다)이라고 좌절하는 것도 모자라 전셋집 구할 때 사기꾼의 덫에 걸리지 않게 용을 써야 하는 현실이다.

정부도 전세 사기 방지 대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세입자가 집주인 동의 없이도 세금 체납 여부를 확인할 수 있게 하고, 공매·경매 때 밀린 세금보다 전세 보증금을 우선 변제하도록 할 예정이다. 담보 순위와 상관없이 세입자가 돌려받을 수 있는 보증금 상한액을 올리고, 전세 사기 피해자에게 저리(低利)로 돈을 빌려주는 방안도 추진한다. 하지만 세입자가 노심초사하며 보증금 안 떼일 전셋집을 찾게 돕고, 사기를 당하고 나서 피해를 구제하는 대책으로는 부족하다. 타인의 전세금으로 배를 불릴 엄두가 나지 않게 악질 임대인을 가혹하게 처벌하는 법적 근거부터 마련해야 한다.

[진중언 산업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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