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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선물 주는 가을 닮은 병…신간 '치매의 거의 모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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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뇌 건강 클리닉에 참여 중인 남성들
(EPA=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영국국민의료보험(NHS) 비상임팀장으로 근무하던 웬디 미첼은 2014년 7월 치매 판정을 받았다. 기억력 저하, 계속되는 검사 탓에 어느 정도 예견했지만 58세라는 나이를 고려하면 충격적인 결과였다. 미첼은 앞으로 드러날 병의 계획된 경로에 두려움을 느꼈다. 갑자기 삶에 대한 통제력도 상실한 것 같았다.

최근 번역돼 출간된 '치매의 거의 모든 기록'(문예춘추사)은 치매 환자가 쓴 치매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인 웬디 미첼은 치매 환자로서 수년 동안 간병인 없이 보낸 일상의 나날들을 담백하게 써 내려간다.

치매를 앓는다는 건 일상의 균열을 의미한다.

좋아하던 고기도 더는 먹을 수 없게 된다. 얼마나 씹는지에 대한 감각이 둔해져 고기를 먹다 목에 음식이 걸리는 일이 자주 발생하기 때문이다. 뜨거운 감자를 먹고도 감자가 뜨거웠다는 사실을 금세 잊어 다시 먹다가 입 안에 화상을 입기도 한다.

실제로 저자가 인용한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치매 환자의 50%가 먹고 마시거나 삼키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시각, 청각, 후각 등 감각 체계도 무너진다.

저자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갑자기 화재 특유의 냄새를 맡았다. 불이 난 곳을 찾아 다급하게 집안 이곳저곳을 살펴봤지만, 화재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벽걸이 평면 TV는 벽에 난 커다란 구멍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각종 환청에도 시달린다. 이 모든 것이 뇌가 부리는 속임수다.

연합뉴스

책 표지 이미지
[문예춘추사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하지만 가끔 마법 같은 순간도 찾아온다.

저자는 어느 화창한 날 잔디밭에서 20년 전 죽은 아버지가 서 있는 모습을 봤다. 녹색 카디건을 입고 여유로운 미소를 보이며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환시라고 느껴질 때 통상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어 사실 여부를 판별하지만, 그때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

"이번에는 그냥 멈춰 서서 바라보며 치매가 가져다준 이 선물을 즐기기로 했다."

저자는 치매가 생각만큼은 두려운 병이 아니라고 말한다. 실망스러운 진단이지만 모든 인생사가 그렇듯, 치매에도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 뒤에 일어날 일 때문에 가을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가을은 풍부한 색상과 다양한 과일로 가득하다. 가을은 계절의 말미에 있다. 그렇다. 즐거운 여름, 심야의 잔디밭, 머리 뒤로 느리게 넘어가는 태양에 작별 인사를 한다. 가을은 본질적으로 꺼지는 빛이다. 치매 같은 병을 표현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계절이 있을까?"

조진경 옮김. 260쪽. 1만6천원.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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