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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대우조선 매각이 신호탄… 산업은행, 역할 재편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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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은행 대주주 시스템의 효용성이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강석훈 산업은행 회장, 9월 14일 기자간담회 발언


산업은행이 대우조선해양의 매각을 시작으로 기업 구조조정 방식의 변화를 예고했다. 거듭된 기업 구조조정 실패에 따라 부실기업을 오래 보유해 정상화한 뒤 매각하는 방식 대신 시장 원리에 따라 신속히 구조조정을 하는 방식으로 선회한다.

이와 맞물려 정책금융기관으로서의 산은의 역할도 변화된다. 산업은행은 부실기업을 관리하는 ‘법정관리자’ 성격 대신 산업의 세대교체와 혁신을 주도하는 ‘거시 조정자’의 역할에 집중할 계획이다. ‘과거’에 머물지 않고, ‘미래’의 산업 육성을 주도하겠다는 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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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훈 KDB산업은행 회장이 26일 오후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에서 대우조선해양 현안 관련 긴급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강 회장은 대우조선해양 관련 한화그룹과 2조원 규모의 유상증자 방안을 포함한 조건부 투자합의서(MOU)를 체결했다고 밝혔다./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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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은, 기업 구조조정 속도 빨라진다

산업은행은 지난 26일 대우조선해양을 한화그룹에 매각하겠다고 발표했다. 21년간 산은 산하에 있던 대우조선해양의 매각이 가시화된 것이다. 이로써 윤석열 정부의 산은이 추구하는 방향성도 뚜렷해졌다. 기업 정상화를 통해 매각을 하는 대신 기업 구조조정을 신속하게 처리해 시장에 맡기겠다는 메시지가 분명해진 것이다.

강석훈 산은 회장은 지난 14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기업구조조정 방식을 바꾸겠다고 밝혔다. 그는 “대주주의 책임 있는 역할, 이해당사자의 고통 분담, 지속가능한 경영정상화 방안이라는 기존 산은 구조조정 기조에 더해 신속한 매각 추진이라는 게 원칙”이라며 “매각이 가능할 때 바로 매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 산은의 역할 재편은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예고됐다. 정부는 지난 6월 경제정책방향 발표를 통해 “정책금융이 민간의 역동적 혁신을 효과적으로 지원하도록 민간과의 중복을 최소화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산은이 보유한 나머지 기업들에 대한 정리 작업도 빠르게 추진될 전망이다. KDB생명보험, HMM이 현재 산은 관리 체제에 있다. 강 회장은 KDB생명보험에 대해 “금리 상승으로 매각 여건이 좋아진 것으로 안다”며 “곧 매각 작업을 시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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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조선해양이 20년 넘는 기나긴 매각 작업 끝에 한화그룹에 매각될 예정이다. 사진은 이달 26일 오후 경남 거제시 아주동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 설치된 대형 크레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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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년 보유하고도 기업 가치는 ‘뚝’… 기존 시스템 한계 분명

산은이 기업구조조정 원칙에 ‘신속 매각’을 추가한 데는 기존 방식으로는 성공적인 구조조정이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산은은 지난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기업의 법정관리인 역할을 맡은 뒤 부실기업의 지분을 보유하고 경영을 정상화해 좋은 가격에 파는 방식을 고수했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산은 관리 체계 하에서 회생에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곳은 HMM, 두산중공업, 대우건설 정도다. 이마저도 산은의 공보다는 각 회사의 역량과 시장 상황의 영향이 컸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대규모 기업 매각이 실패한 사례는 더 많다. 문재인 정부 당시 산업은행을 이끈 이동걸 전 회장도 기업 구조조정을 과감하게 추진했지만, 손에 잡힐 만한 결실을 거두지는 못했다.

최근 매각이 가시화된 대우조선해양이 대표적인 예다. 대우조선해양은 2019년 현대중공업그룹에 매각을 결정했지만, 결국 유럽연합(EU)의 기업결합심사를 통과하지 못해 매각이 어그러졌다. 이 회장은 ‘EU의 자국이기주의’를 매각 실패의 원인으로 돌렸으나, 이 가능성마저도 매각 추진 과정에서도 고려했어야 한다는 시각도 있었다.

최근 KG그룹에 인수된 쌍용차는 이 회장 재임 시절 에디슨모터스로 매각되는 작업이 진행됐으나, 인수 대금 마련 등의 이유로 무산됐다. 아시아나항공은 대한항공에 인수·합병(M&A)을 추진하고 있지만, 여전히 결론이 나지 않은 상황이다. KDB생명 역시 주인을 찾지 못하고 산은 관리 체제 하에 있다.

매각은 이뤄졌으나 성공적이라고 보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2017년 금호타이어를 중국 상용차 타이어 회사 더블스타로 매각했다. 당시 2조2300억원을 지원한 금호타이어를 6500억원에 넘기고, 더블스타에 대한 경영능력에 대한 의문까지 제기됐지만 매각은 강행됐다. 결국 금호타이어는 아직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STX조선해양의 경우 5조4000억원이 투입되었는데 유암코-KHI인베스트먼트에 불과 2500억원에 매각이 됐다. 동부제철은 1조8600억원이 투입돼 KG그룹에 3600억원에 매각됐다.

은행 관계자는 “주채권은행이 산은일 경우 일반은행보다 구조조정이 지체되고 자금 지원 규모는 크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며 “산은 체제의 기업은 주인이 없다 보니 전문성 있는 최고경영자(CEO)가 오기 어렵고 이는 결국 기업 경쟁력 훼손으로 이어진다는 점도 문제”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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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은행 전경/산업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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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은, 정책금융 역할 재편… 법정관리인·배드뱅크 역할 축소

산은은 정책금융기관으로서 역할도 재편할 예정이다. 부실기업에 자금을 투입해 대주주 또는 채권자로 기업을 회생시키는 법정관리인이자 배드뱅크의 역할에 집중하는 대신 기업구조조정을 신속하게 마무리하고 미래 산업을 선도하는 역할에 초점을 맞출 것으로 보인다.

강 회장은 27일 서울 서초동 한국산업연합포럼(KIAF)의 조찬 포럼에서 ‘경제환경 변화와 산업은행의 새 역할’이라는 주제로 강연하며 글로벌 경제와 한국 산업 구조가 변화하면서 산은 역할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시장 성숙도가 낮아 재정 투입이 필요한 영역과 성숙도가 높아 민간에서 충분히 투자가 이뤄지는 영역 사이에 일종의 금융 갭(financial gap)이 존재한다”며 “이 영역에서 정책금융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산업은행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2차 전지 등 초격차산업과 바이오, 원자력, 전기차 등 유망 신산업에 집중적으로 지원할 방침이다. 또 조선, 석유화학 등 전통 제조업의 녹색 전환에도 투자할 계획이다.

김유진 기자(bridge@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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