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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피난길에 만난 스웨덴 야전병원…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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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의대생이 스웨덴 이민 1세대가 되기까지… 참전용사 예우받는 순애 앵베리씨


파이낸셜뉴스

한국전쟁 중인 1953년 스웨덴 야전병원의 입구 모습 순애 앵베리씨 가족 제공 한국전쟁 중인 1953년 스웨덴 야전병원 풍경 순애 앵베리씨 가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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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뉴스 스톡홀름(스웨덴)=
】 1950년 9월 23일, 부산에 문을 연 스웨덴 야전병원에는 스웨덴 의료진만 근무했을까. 순애 앵베리씨(92·사진)는 6·25전쟁 전까지 서울대 의대 본과 1학년에 재학 중인 전도유망한 의학도였다. 그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건 우리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이었다.

순애씨는 지난 23일 주스웨덴 한국대사관이 국가보훈처와 함께 스웨덴 야전병원의 부산 상륙일인 9·23을 기념하는 행사를 마친 뒤 파이낸셜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북한군이 탱크를 밀고 서울을 공격하던 그날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그는 "강당에 있는데 당장 집에 가야 한다고 해서 나왔더니 길거리에 사람들이 이미 죽어 있었다"면서 "사촌오빠가 트럭을 몰고 와서 동네 사람들과 같이 그 길로 경주로 내려왔다"며 몸서리를 쳤다. 의사였던 외삼촌은 이미 야전병원을 운영하고 있었고, 순애씨는 외삼촌을 도와 주사를 놨다. 뒤늦게 피난길에 오른 부모님과 상봉해 부산으로 간 순애씨는 우연히 길에서 스웨덴 야전병원을 보고 근무를 지원했다. 스웨덴 야전병원 역시 밀려오는 부상병으로 의사가 필요했고, 순애씨는 능력을 인정받아 엑스레이실에서 2년 넘게 근무했다. 주스웨덴 한국대사관이 순애씨를 스웨덴 참전용사와 동등하게 예우하는 이유다.

순애씨는 "당시 야전병원은 정말 텐트를 치고 환자를 받았다"면서 "수술실, 엑스레이실 정도만 건물다운 건물에 있었지 다 임시천막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당시 한국은 너무 가난해서 길거리에 거지도, 부상병도 많았고 불구자가 되어 기어다니는 사람도 있었던 정말 비참한 시절이었다"며 고개를 저었다. 순애씨는 스웨덴 의사, 간호사 등 10명과 한 팀으로 일했다. 순애씨처럼 피난온 의대생 등 꽤 많은 한국사람이 야전병원에서 스웨덴 의료진과 손발을 맞췄다.

순애씨는 야전병원에서 평생의 배우자를 만나 지난 1954년 스웨덴으로 이주했다. 그의 남편은 결혼을 약속한 뒤 스웨덴으로 돌아가 순애씨에게 비행기표를 보냈다. 그는 54시간 만에 스톡홀름 브롬마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스웨덴으로 이주한 이민 1세대인 셈이다. 전쟁터에서도 살아난 순애씨에게 해외이주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의학도로서의 꿈은 접어야 했다.

그는 "의사의 꿈을 접는 것은 아쉬웠지만 스웨덴어, 영어, 속기, 통역, 관광 등 여러 가지를 끊임없이 공부했다"면서 "외국인이 공부하는 것도, 여성으로 스웨덴에서 일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일을 쉬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은행에서 일하다 통역·관광 관련 스웨덴 정부 자격증을 취득하고 관광회사를 운영했다. 한국·일본 관광객을 대상으로 스웨덴 정치·사회·역사·문화를 알리며 '인생 제2막'을 부지런히 보냈다. 그는 "아흔 평생을 돌아보면 정말 쉬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면서 "6·25전쟁을 겪었지만 많이 공부하고 인생을 많이 경험해서 이렇게 역사를 증언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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