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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일상이 예술이 되는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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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출처 : 한국미술재단 '학교 안 작은 미술관'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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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분야를 공부하다 보니 낯선 경험을 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기도 합니다. 예술은 여유 있는 사람들의 치장 정도로 치부해왔는데, 결국은 아름다움에 대한 탐구가 아닐까 합니다. 예술을 다른 사람과의 구별 짓기나 차별화의 방식으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예술이라기보다는 자본과 욕망의 남용이나 오용이 아닐까요.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은 누구로부터 잘 보이고 싶은 마음때문만은 아닙니다. 스스로의 자부심이 먼저입니다. 예술도 그래야 합니다. 먹고 살아가기에도 힘든 사람들에게 책을 읽게 하고, 노숙인들에게 인문학을 접하게 하고, 학생들에게 문학을 읽으라고 하는 이유는 삶이 더 윤택하고 풍요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예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름다운 장면을 보고 감탄하고 감동하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감동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일 수도 있고, 위대한 건축물일 수도 있고, 심금을 울리는 음악일 수도 있고, 내면을 깨우는 그림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문학과 건축, 음악과 미술입니다.

예술을 더 재밌고 흥미롭게 즐기기 위해서는 약간의 공부도 필요합니다. 모두가 창작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좋은 작가가 좋은 작품을 창작하는 것 못지않게 좋은 독자와 좋은 관객이 좋은 작품을 알아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예술의 효과와, 향유하는 방법과 관련한 용어로 각각 엘랑 비탈, 푼크툼과 스투디움이 있습니다.

엘랑 비탈(élan vital)은 항상 새로운 자기를 형성하기 위해 생명의 내부에서 분출되는 힘을 말합니다.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이 명명했는데, 그는 이 힘을 생명의 본질로 규정했습니다. 생명의 비약, 생의 약진을 뜻합니다. 우리는 예술에서 그런 생의 약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만물이 소생한다는 봄(spring)에 생명의 기운을 만끽합니다.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듯 풀들이 싹을 틔우고, 나무의 잎들이 움을 틔웁니다.

가을에는 낙엽이 되고, 겨울에는 동면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자연의 계절 변화에 따라, 날씨 변화에 따라 기분이 오락가락하기도 합니다. 그런 외부적인 환경과 조건에 휘둘리지 않는 방법 중의 하나가 예술입니다. 문학을 통해서, 음악과 그림을 통해서, 영화와 드라마, 뮤지컬과 콘서트를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꿈꾸고,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아보기도 합니다.

더불어, 함께하는 사람들과 그에 대한 생각을 나누면서 기쁨과 즐거움, 감동은 커집니다. 가벼운 수다는 본격적인 토론이 되기도 합니다. 예술이 그 자체로만 아름답고 감동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걸 향유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술은 예술가의 작업만으로 끝나지 않고, 독자와 관객이 각자의 해석으로 느끼고 감동해야 예술의 역할을 다합니다. 독자와 관객은 작가와 예술가가 보내는 신호, 은유와 비유의 메시지를 각자의 경험과 지식으로 해석합니다.

푼크툼(punctum)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진 작품을 감상할 때 관객이 작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작품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카메라 루시다>에서 얘기한 개념입니다. '찌름'을 뜻하는 라틴어 punctionem에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푼크툼은 똑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일반적으로 추정하거나 해석할 수 있는 의미나, 작가가 의도한 바를 그대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지극히 개인적으로 작품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푼크툼은 '찌름'이라는 의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신의 경험에서 오는 강한 인상이나 감정을 동반합니다.

예술 작품도 아는 만큼 보이지만, 그렇다고 누군가의 해석에 매몰될 필요는 없습니다. 정답이 있는 건 아닙니다. 문학 작품이나 예술 작품에 정답이 있을 리 없습니다. 소설의 주제, 작가의 의도를 묻는 시험 문제를 그 작품을 쓴 작가가 골랐더니, 오답이었다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는 게 우리 교육의 현실입니다. 예술은 모든 일에는 정답이 있다는 우리 사회의 '정답강박증'을 해소하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롤랑 바르트는 푼크툼과 함께 스투디움(studium)의 개념도 정의했는데, 이는 사진을 볼 때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공통된 느낌을 갖는 것을 뜻합니다. 즉 작가가 의도한 바를 관객이 작가와 동일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독자와 관객이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푼크툼, 작가와 동일하게 느끼는 스투디움, 우리에게는 나만의 해석과 작가와의 공감, 모두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매일경제

출처 : Qwaya 뛰어놀기 Jumping on the trampoline 2021 Oil on Canvas 91x7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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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수 우버객원칼럼니스트 (즐거운예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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