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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싱크로나이즈드 수영 선수에서 IMF 총재까지, 그녀의 성공 신화 [글로벌 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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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틴 라가르드, G7 최초의 여성 재무장관·최초의 여성 IMF 총재· 최초의 여성 ECB 총재를 잇따라 지내

세상에는 문화·인종·국적의 원천이 다양한 ‘하이브리드 인재’가 많습니다. 정치·종교의 핍박을 피한 이주민이나 후손이 국가의 명운을 가르기도 합니다. 국경을 초월해 족적을 남기는 이들의 삶을 들여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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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의 최근 모습/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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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들어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여성을 한명 꼽으라면 누구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어떤 기준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각자 생각이 다를 수 있겠죠. 얼른 떠오르는 사람은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 미셸 오바마 전 미국 퍼스트 레이디,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 의장,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 정도일 겁니다.

그중에서 저는 라가르드 ECB 총재를 이번 세기 들어 가장 성공한 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라가르드는 여성 최초의 기록을 여럿 가지고 있습니다. G7 선진국에서 최초의 여성 재무장관(한국의 경제 부총리격)을 지냈습니다. 최초의 여성 IMF(국제통화기금) 총재였고, 역시 최초의 여성 ECB 총재입니다. 변호사 숫자로 세계 3위인 베이커앤맥킨지(Baker & McKenzie)라는 미국 초대형 로펌에서 최초의 외국인 대표 겸 최초의 여성 대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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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패션의 나라 프랑스 출신답게 화려한 액서서리를 즐긴다./크리스틴 라가르드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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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영향력이 큰 여성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메르켈 전 총리가 으뜸이겠지만 그는 인생을 독일 안에서 머무른 사람이었습니다. 힐러리 클린턴, 미셸 오바마는 미국이란 초강대국의 후광을 얻었고 남편의 이름값에 큰 신세를 진 여성들입니다. 펠로시나 폰데어라이엔은 활동 영역이 좀 더 제한적이고 유명세의 관점에서 ‘여성 최고’라고 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감이 있다고 봅니다. 해리스 부통령은 선거에서 유색 인종 표를 얻기 위해 정치공학적으로 만들어진 느낌이 강합니다.

얼마나 도전적인 삶을 살았는지, 얼마나 넓고 다양한 영역에서 족적을 남겼는지를 종합한다면 라가르드가 단연 돋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유럽에서 충분히 먹고 살만 했지만 안주하지 않고 미국에 건너가 도전해서 더 많은 기회를 얻었다는 점에서 개척자적인 면모가 있다고 봅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여성이라는 점을 높게 생각합니다. 그녀는 파리→시카고→파리→워싱턴DC→프랑크푸르트로 활동 무대를 옮겨가며 살아오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두번째로 영향력이 큰 중앙은행을 이끄는 여성

요즘은 전세계적인 금리 인상기를 맞아 ECB를 이끌고 있는 라가르드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많이 비춰지고 있습니다. 인더미트 길 세계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 인터뷰에서 “최근 50년을 놓고 볼 때 전 세계적인 통화긴축의 강도가 요즘이 가장 세다”고 했습니다. 중앙은행과 통화정책에 대한 관심이 이만큼 많았던 적도 없을 것 같습니다.

가장 영향력이 큰 중앙은행은 최강의 화폐 달러를 쥐고 흔드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하 연준)입니다. ‘글로벌 노마드’ 시리즈는 아니지만 저는 지난 추석 연휴용 온라인 기사로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어떤 사람인가를 심층적으로 조명해봤습니다. 요즘 전세계 언론을 뒤덮는 파월 의장에 대해 궁금하신 분은 잠깐 먼저 보고 오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www.chosun.com/economy/economy_general/2022/09/09/XKKLGZE35ZB2LKIFE4AMNIR2HE)

오늘은 연준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영향력이 큰 중앙은행인 ECB를 이끄는 라가르드 총재의 인생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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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 의장(오른쪽)과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크리스틴 라가르드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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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악물고 웃는 법을 배웠다” 싱크로나이즈드 국가대표 이력

프랑스 국적인 라가르드는 1956년 파리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대서양 연안에 있는 프랑스 제2의 항구도시 르아브르에서 보냈습니다. 10대 시절 싱크로나이즈드 수영선수로 활동했습니다. 국가대표로 발탁되긴 했지만 세계 대회에서 성적을 낼 정도는 아니었고 프랑스 전국대회에서 동메달을 딴 이력이 있었습니다.

싱크로나이즈드 수영을 했다는 건 그녀의 삶에 큰 밑천이 됐습니다. 그녀는 후일 “이를 악물고 웃어야 하는 법을 그때 배웠다”고 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남에게 밝은 웃음을 보여주는 훈련을 했다는 겁니다.

1974년 바칼로레아(대입 자격 시험)를 통과한 라가르드는 프랑스에서 바로 대학을 진학하지 않고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AFS라는 국제 청소년 다문화 교환 프로그램을 통해 메릴랜드주 베데스다에 있는 홀튼암스스쿨이라는 학교에서 대학 입학 예비과정을 다녔습니다. 이 학교는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가 다녔던 곳으로 유명하죠. 라가르드가 활용한 AFS프로그램은 미국 학생들을 해외로 보내고 외국 학생들을 미국으로 받아서 자원 봉사자 집에서 숙식하며 학교를 다니게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성인이 되기 이전에 미국에서 공부를 한 건 라가르드에게 인생의 커다란 도전이자 변곡점이었습니다. 영어를 완벽에 가깝게 익히고 미국 문화를 체험하며 글로벌한 감각을 익힌 것이죠. 제가 작년까지 파리에서 특파원으로 4년을 근무해보니 요즘 프랑스 젊은이들은 영어를 꽤 잘합니다.

하지만 라가르드가 10대이던 시절만 하더라도 영어 잘하는 프랑스인이 흔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당시는 프랑스 국력이 지금보다 강했고 불어의 위세도 더 높았습니다. 지금에 비하면 프랑스인들이 외국어를 익히려는 열의가 덜한 시절입니다. 라가르드가 어린 시절 영어나 다른 외국어를 빨리 배웠던 건 아버지가 영어 교사였고, 어머니가 프랑스어와 라틴어를 가르치는 교사였다는 점도 영향이 있었을 걸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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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왼쪽)과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 선진국에서 중앙은행 총재와 재무장관을 모두 지낸 여성은 지금까지 두 사람 밖에 없었다./크리스틴 라가르드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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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행정학교(ENA)에 두번 낙방하다

미국에 있는 동안 라가르드는 의회 인턴으로 윌리엄 코언 하원 의원의 보좌진으로 일했습니다. 코언은 후일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국방장관이 된 인물이죠. 코언의 당시 지역구는 북동부 메인주인데요. 이곳은 프랑스어권인 캐나다 퀘벡과 접경지대입니다. 그래서 메인주 북부에는 불어를 쓰는 주민들이 꽤 살고 있고, 라가르드는 불어로 지역구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스캔들’이 라가르드의 인생에 영향을 줍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 의회에 보좌진 관련 조항이 개정돼 외국인의 보좌진 근무가 불가능해졌습니다. 1977년 프랑스로 돌아온 라가르드는 ‘시앙스포 엑스(Sciences Po Aix)’라고 불리는 엑상프로방스정치대학을 졸업합니다.

그리고 나서 프랑스 최고의 엘리트 학교인 국립행정학교(ENA·l’École nationale d’administration)에 도전합니다. 하지만 두번 도전해서 두번 모두 낙방했고, 파리10대학으로 불리는 낭테르대에 가서 석사 2개(영문학과 노동법)와 사회법 고등 전문과정을 마치고 변호사가 됐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여러 학교를 다니는 경우가 제법 많습니다. 라가르드는 후일 “ENA에 두번 떨어지고 나서 사회에 대한 반항심이 생겨 사회법을 전공했다”고 말한 적 있습니다.

◇ENA가 어떤 학교길래 미래의 IMF 총재가 낙방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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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행정학교(ENA)를 졸업한 4명의 전현직 프랑스 대통령들 /조선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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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A에 두번 응시했다가 낙방한 이력은 라가르드의 인생에서 쓴 약이 됩니다. 프랑스 언론들은 라가르드와 관련해 “ENA 도전 실패가 오히려 기회가 됐다”고 자주 보도합니다. ENA는 어떤 학교이며 얼마나 들어가기 어려울까요.

고급 엘리트 관료 양성학교인 ENA는 프랑스식 극소수 엘리트주의를 상징합니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양분된 유럽 문화의 잔재로 볼 수 있습니다. 소수의 초엘리트가 나라를 이끈다는 개념이 투영된 학교인데요. 프랑스 특유의 고등교육기관인 ‘그랑제콜(Grandes écoles)’ 중에서도 대표적인 학교입니다. 샤를 드골 전 대통령이 1945년 전후(戰後) 국가를 재건할 엘리트 양성을 목표로 세웠죠.

1958년 대통령제 시작 이후 마크롱까지 8명의 대통령 중 4명이 ENA 출신입니다. ENA 개교 때 이미 30대 이상이었던 드골, 조르주 퐁피두, 프랑수아 미테랑을 제외하고 학창 시절 ENA를 선택할 기회가 있었던 전·현직 대통령 5명 가운데 이곳을 나오지 않은 사람은 니콜라 사르코지뿐입니다.

ENA 졸업생을 ‘에나르크(énarque)’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끈끈하게 서로 밀고 끌어주면서 프랑스 사회의 핵심 요직을 독차지해왔습니다. 한국에서는 행정고시에 합격하면 사무관(5급)에서 시작하는데요. ENA를 나오면 한국의 서기관급(4급)에 준하는 직위에서 시작합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36세에 재무장관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에나르크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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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크리스틴 라가르드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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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개 고등학교당 한명꼴로 합격, 전임 교수는 단 2명

ENA는 한 해 80여명만 선발합니다. 대학 3학년 이상에 준하는 학력을 갖고 있어야 입학 시험을 치를 자격을 얻는데요. 마크롱이 그랬듯 대체로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의 최상위권이 합격의 영예를 얻습니다. 프랑스의 인문계고가 약 2600개교이란 점을 감안하면 약 30개 고교당 합격자가 한명꼴로 나옵니다. 과거 한국에서 서울대 법대에 들어가는 것보다도 훨씬 희소성이 높습니다.

이렇게 대단한 수재들을 모으는데 왜 세계 대학·대학원 랭킹 상위권에 ENA가 이름을 올리지 못할까요. 그 이유는 영미식 연구 기능을 수행하지 않고 철저한 실무 학교이기 때문입니다. 2년 과정인 ENA에는 전임 교수가 단둘뿐입니다. 외국어로서의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교수와 스포츠 전공 교수 한명씩이 전임 교수의 전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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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마크롱 행정부의 첫 총리였던 에두아르 필리프(왼쪽) 현 르아브르 시장과 두번째 총리인 장 카스텍스가 총리직을 인수인계할 때 모습. 둘 다 국립행정학교(ENA) 졸업생이다./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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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대부분은 연간 1500명에 달하는 외부 전문가를 초빙해 실무 교육으로 진행합니다. 특히, 동문 선배인 정부 고위 인사가 와서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할 때 요령을 가르칩니다. 이를테면 엘리제궁에 보낼 보고서를 작성하는 요령을 전수합니다. 교수가 학생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선배가 후배에게 실무를 전수한다는 얘기죠. 그러니 끼리끼리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특파원으로 근무할 때 알고 지내던 프랑스인들 중에서는 태어나서 에나르크를 직접 만난 적이 한번도 없다는 사람이 여럿이었습니다.

오랫동안 ENA는 ‘그들만의 리그’를 만든다는 비판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마크롱은 과감하게 ENA를 폐지했고, 작년 입학생이 졸업하면 이 학교는 없어집니다. 이른바 ‘노란 조끼’ 시위로 곤욕을 치른 마크롱이 내놓은 쇄신책 중 하나가 모교 ENA를 없애는 거였죠.

마크롱은 ENA 폐교 대신 ‘공공서비스연구소(ISP)’라는 공무원 연수 기관으로 대체한다고 했는데요. 이 기관이 엘리트 집단이 되거나 아니면 다른 그랑제콜의 위상이 더 높아질 것이라는 예상이 많습니다. 학교 하나가 없어진다고 해서 뿌리깊은 프랑스식 엘리트주의가 사라질 수 없기 때문이죠.

대단한 수재를 뽑는다고는 하지만 ENA가 후일 IMF와 ECB 총재가 될 라가르드를 낙방시켰다는 건 사람 볼 줄 모른다는 얘기가 되겠죠. 그리고 얼마나 폐쇄적인지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여자는 파트너 못한다”는 프랑스 로펌 대신 미국 로펌 선택

1981년 낭테르 법대 졸업 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라가르드는 프랑스 로펌에서는 여성이 파트너가 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좌절했다고 합니다. 대신 영어에 능통하다는 특장점을 살려 미국 로펌에 들어갑니다. 시카고에 본사를 둔 초대형 로펌 베이커앤드맥킨지의 파리 사무소에 입사했습니다. 주로 공정거래 사건과 노동법 관련 사건을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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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변호사 시절의 크리스틴 라가르드/24셀러브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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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을 일하고 1987년 이 로펌의 파리사무소 파트너로 승진했고, 1991년에는 시카고 본사에서 매니징 파트너가 됩니다. 매니징 파트너는 로펌에서 지분을 갖고 경영에 참가하는 고위 변호사를 말합니다.

유럽식 세련된 매너, 근면 성실한 태도, 토론에 강한 리더십이 조명을 받았습니다. 라가르드는 1995년에는 베이커앤드맥킨지의 본사 집행위원회 멤버로 발탁이 됐고 1999년에는 이 로펌이 설립된 지 50년만에 최초의 여성 대표 겸 최초의 비(非)미국인 대표가 됐습니다. 두 가지 벽을 한번에 깨버렸다는 점에서 미국 법조계의 상당한 뉴스였습니다. 베이커앤드맥킨지는 작년 기준으로 세계 77개 사무소에 변호사만 약 4800명, 전체 직원은 1만3000명에 달하는 초대형 로펌입니다. 작년 매출이 원화로 4조4100억원 정도입니다.

◇미국 초대형 로펌 베이커앤드맥킨지의 첫번째 외국인이자 여성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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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가르드가 일한 미국 초대형 로펌 베이커앤드맥킨지의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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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까지 5년간 베이커앤드맥킨지의 대표로 활동한 라가르드는 이 기간 매출을 1.5배로 늘려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습니다. 라가르드는 5년이던 이 회사 로펌 대표 임기를 자청해서 3년으로 줄여달라고 한 다음 이후에 1년씩 두번 연임을 해서 5년을 일합니다.

그는 임기를 줄여달라고 한 이유에 대해 “전임 대표들이 오래 하다보니 살찌고 지치더라”라는 이유를 댔습니다. 그것도 화제였습니다. 라가르드는 미국 법조계에서 유명인사가 됐고, 프랑스에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합니다. 로펌 대표직에서 물러난 2005년 라가르드는 다시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녀가 금의환향하게 된 건 당시 총리였던 도미니크 드 빌팽의 전화에 따른 것이었다고 합니다. 라가르드의 성공 비결은 안주하지 않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라가르드는 후일 “그때 파리에서 돌아와서 공직을 맡아 달라는 전화를 받고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며 “아늑한 시카고 생활을 정리하고 가방을 쌌다”라고 했습니다.

고국에 돌아온 ‘국제통’ 라가르드를 자크 시라크 당시 대통령은 대외무역부 장관으로 임명합니다. 장관이 된 지 이틀만에 라가르드는 “고용에 도움이 되지 않는 완고한 프랑스 노동법을 바꿔야 한다”며 우파 색깔을 분명하게 드러내 관심을 받았습니다.

라가르드가 노동법을 공부한 낭테르대는 1968년 6·8혁명의 진원지로서 좌파 노동운동의 발상지 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미국 로펌 소속으로 미국에서 오래 일하고 돌아온 라가르드의 눈에는 프랑스 노동법이 구닥다리였고 좌파적 성향이 강하게 느껴졌던 거죠. 라가르드는 프랑스의 35시간 근무제를 유연하게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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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가르드가 공부했던 파리 근교 낭테르대. 뒤로는 파리 근교 첨단 업무 지구인 라데팡스가 보인다./르피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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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7 최초의 여성 재무장관으로 기용

라가르드가 2년간 대외무역부를 이끌고 난 2007년 봄 프랑스에서는 대선이 있었고 우파 정당 대중운동연합을 이끈 니콜라 사르코지가 승리합니다. 사르코지는 조각을 짜면서 라가르드를 농림수산부 장관으로 기용합니다. 프랑스는 유럽 최대 농업국가로서 농림부 장관의 위상이 높은 나라죠. 현재 헌법 체제가 만들어진 1958년 이후 라가르드는 총리를 지낸 에디트 크레송에 이어 여성으로는 두번째 농림부 장관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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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틴 라가르드를 재무장관으로 기용하며 중용한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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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가르드는 180cm에 가까운 큰 키에 과감한 패션 스타일 그리고 맡은 업무에 대한 열정이 상당한 평가를 받았습니다. 또 프랑스에서도 점점 영어를 잘하는 국제통을 인정해주는 방향으로 사회적 분위기가 바뀐 것도 그녀에게는 도움이 됐습니다.

사르코지는 2007년 라가르드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G7(당시는 러시아까지 해서 G8이었죠)에서 처음으로 여성이 정부 경제팀을 이끌게 된 것입니다. 라가르드는 2011년까지 4년간 재무장관을 지내면서 글로벌 금융위기를 버텨냈습니다. 미국식 직장 문화에 익숙했던 라가르드는 프랑스 고위 관료들의 남성 중심 문화가 낯설어 힘들어했지만 이를 극복해냈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유럽식 전통과 질서에 집착하는 프랑스인들은 미국 스타일인 라가르드를 가리켜 ‘라 아메리칸느’라며 비아냥댔습니다. 라가르드는 상속세 인하와 노동 규제 제거와 같은 우파적 성격이 강한 정책을 추진해 좌파들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어쨌거나 라가르드의 지명도는 계속 올라갑니다. 2009년 파이낸셜타임스(FT)가 선정하는 유로존 최고의 재무장관으로 선정됐습니다. 2009년과 2010년에 2년 연속 미국 타임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포함되며 국제 무대에서 인지도를 높였습니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삐딱하고 독선적인 성격 때문에 메르켈 독일 총리와 사이가 나빴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라가르드가 사르코지 대신 직접 메르켈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유럽의 현안을 풀곤 했다는 게 당시 유럽 언론들 보도 내용입니다. 성공한 여성이 다른 여성들과 부딪히는 경우가 제법 있지만, 라가르드는 그런 이야기를 덜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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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왼쪽)와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크리스틴 라가르드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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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부터 라가르드는 차기 총리 감으로 프랑스 언론에 오르내리기 시작하지만 그녀는 의회에 진출한 적이 없어 본격적인 정치인을 하기에는 거리가 있어 보였습니다.

◇성폭행 저지른 스트로스-칸이 물러나고 여성 최초 IMF 총재로 취임

2011년 IMF에서 큰 사건이 벌어집니다. 프랑스 국적인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IMF 총재가 뉴욕의 한 호텔에서 여종업원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질러 현장에서 체포됩니다. 체포된 지 닷새만에 스트로스-칸은 IMF 총재직을 사퇴하고 차기 총재를 뽑게 됐습니다.

2차대전 이후 미국과 유럽 간에는 암묵적인 룰이 있습니다. 세계은행 총재는 미국이 맡고 IMF 총재는 유럽에서 맡는다는 겁니다. 1946년 IMF 출범 이후 불가리아 출신인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현 총재까지 12명의 역대 IMF 총재는 모두 유럽인입니다. 국적별로 나눠보면 프랑스 5명(그중 한명이 외환위기 때 우리나라에서 ‘저승사자’로 불린 미셸 캉드쉬입니다), 스웨덴 2명, 독일·벨기에·네덜란드·스페인·불가리아 각 1명씩입니다. 프랑스에서 IMF 총재를 많이 배출했던 건 독일이 1990년까지 분단 국가였던 점이 작용했고, 영국 출신이 없었던 건 앵글로 색슨에게 유럽 몫을 주지 않겠다는 유럽 본토의 분위기가 작용했다는 게 중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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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종업원을 대상으로 성폭행을 저질러 체포됐던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IMF 전 총재/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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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스트로스-칸이 큰 사고를 쳐서 IMF 총재에서 물러나게 됐는데, 유럽에서 마침 라가르드 외에 IMF 총재를 맡을만한 인물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ENA 졸업생인 프랑스 출신 장 클로드 트리셰 ECB 총재나 독일의 악셀 베버 분데스방크(중앙은행) 총재가 거론됐지만 라가르드만큼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습니다. IMF에서 목소리가 커진 중국을 프랑스 정부가 구워삶아 중국도 암묵적으로 라가르드를 지지했습니다. 미국은 ‘친미 성향’이 강한 라가르드를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재무장관으로서 카운터 파트너였던 티모시 가이트너 당시 미국 재무장관은 라가르드를 가리켜 4가지 특징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번개같이 빠른 재치, 진정한 따뜻함, 분열을 해소하는 능력, 프랑스 이익에 맹렬히 충성하는 능력이 나를 놀라게 한다.”

◇변호사가 전문성 없이 IMF 총재를 이끈다는 반발 기류

하지만 라가르드가 IMF 총재가 될 때 반발도 많았습니다. 특히, 좌파 진영에서 비판이 컸습니다. 프랑스 내에서도 ‘미국 물 먹은’ 라가르드에게 냉소적인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영국의 가디언은 친미주의자인 라가르드가 월가의 대형 은행들의 이익을 대변할 거라며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가디언은 영국의 좌파를 대표하는 신문이니 이런 식의 비판이 어쩌면 당연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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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DC의 IMF 본부 건물에 걸려 있는 IMF 로고./로이터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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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라가르드의 전문성에서도 시비가 걸렸습니다. 재무장관을 지내긴 했지만 원래 경제학자가 아니고 노동법 전문 변호사였다는 거죠. 저명한 이코노미스트들이 역대 IMF 총재였던 것과 다르다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좌파 신문이 아닌데도 당시 파이낸셜타임스는 사설에서 “총재 선임에 있어서 ‘유럽’이라는 국적보다 ‘실력’에 더 방점을 두어야 한다”고 했는데요. 영국이 금융 선진국이지만 IMF 총재를 자신들이 차지하지 못한다는 불만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측면도 있습니다.

영국은 EU에서 탈퇴해버렸기 때문에 앞으로 IMF 총재 자리를 가져갈 확률이 더욱 낮아졌습니다.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 합니다. EU 회원국들이 찬성할 리가 없을테니까요.

◇IMF 총재 두번째 임기 도중 ECB로 자리 옮겨

2016년 라가르드는 5년의 IMF 총재 임기를 무난하게 수행했고, 5년 연임에 성공합니다. IMF는 구제금융을 해준 개발도상국에게 가혹하게 굴었던 게 전통입니다. 우리나라가 미셸 캉드쉬 총재 시절 IMF 요구로 뼈를 깎는 구조조정에 들어갈 때 익히 경험했죠.

그런데 라가르드는 대체로 유화적으로서 회원국들에게 까다롭게 굴지 않았습니다. 그의 총재 재임 기간이 2011년부터 2019년까지니까 운이 좋게도 글로벌 금융위기는 마무리된 시점부터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직전까지라서 전세계를 뒤흔든 위기는 없었습니다. 일각에서는 라가르드가 경제학 전공자가 아니어서 권위를 갖지 못했다는 비판도 합니다. 실력이 없지만 대형 로펌을 이끌 때 변호사로서의 자질을 살려 대화와 토론에 능해서 그런 측면에서 조직 관리는 잘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라가르드는 IMF 총재직을 3선에 도전하지 않고 중도에 사퇴한 뒤 2019년 자리가 빈 ECB 총재로 이동합니다. 마리오 드라기 총재의 임기가 끝났을 때죠. ECB 총재 임기가 8년이라 라가르드는 만 71세가 되는 2027년까지 ECB 총재직을 맡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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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유럽중앙은행(ECB)./로이터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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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는 27개 회원국이 있지만 어떤 이슈가 있든지 간에 독일과 프랑스 두 나라의 의견이 일치하면 작은 나라들의 소수 의견은 힘으로 눌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시 EU의 행정부 수장격인 집행위원장을 뽑는 작업이 난항을 겪었는데요. 독일 국방장관이었던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을 EU 집행위원장으로 마크롱이 받아들여주는 대신 ECB 총재를 프랑스가 맡겠다고 하는 협상이 성사됐습니다. 그래서 라가르드가 ECB 총재가 됐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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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왼쪽) EU 집행위원장과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함께 EU 정상들로부터 추대를 받았다./크리스틴 라가르드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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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정책 한번도 안해보고 ECB 총재 맡아 또다시 ‘전공’ 시비

그런데 이번에도 ‘전공’에 대한 시비가 걸렸습니다. 재무장관과 IMF 총재를 했다고 하더라도 라가르드가 통화정책에 발을 들여놓은 경험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라가르드가 ECB를 맡을 당시는 유럽의 고질적인 저성장을 극복하기 위해 인플레이션을 높이고 경기 부양을 위해 확장적인 통화정책을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의 취임 후 수개월만에 찾아온 코로나 사태를 맞아 ECB는 미 연준처럼 초완화적 통화정책을 가동하면서 현금을 무식하게 풀어 위기에 대응했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반대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글로벌 인플레이션이 심각한 지경으로 치닫고 있어 ECB도 지난 7월 2011년 이후 처음으로 기준금리를 인상하면서 ‘제로(0)금리’에서 벗어났고, 9월에는 ‘자이언트 스텝(0.75%포인트 인상)’으로 기준금리를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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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유로화 탄생 20주년을 기념하는 조명이 ECB 본부 건물 외벽을 비추는 장면/로이터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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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ECB는 미 연방준비제도처럼 거침 없이 금리를 올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유로존에는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등 남유럽의 고질적인 재정난에 시달리는 나라들이 많습니다. 이런 나라들은 금리가 뛰면 갚아야 할 국채 이자가 큰 폭으로 뛰어 크게 흔들릴 위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경제학 비전공자인 라가르드가 어떤 통화정책을 펼칠 지 유심히 지켜봐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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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한국의 경제계 인사와 만났을 당시 크리스틴 라가르드 당시 IMF 총재. 왼쪽부터 김윤 삼양홀딩스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 김주연 한국피앤지 사장, 이창용 IMF 아시아태평양국장(현 한국은행 총재)./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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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살 없는 몸매 가꾸고 에르메스 스카프를 즐겨 맨다

라가르드는 국경을 뛰어넘어 영역을 개척해온 사람입니다. IMF와 ECB라는 거대한 국제 기관에서 모두 최초의 여성 수장을 지냈다는 건 평범한 에너지와 잠재력으로는 불가능한 성과입니다. 일부에서는 그를 헐뜯기도 하지만 세계적인 유명 인사에게 그 정도 비판 내지 혹평이 뒤따르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미국 포브스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에 라가르드는 2018년 이후 작년까지 계속 3위 이내에 올랐습니다. 작년의 경우 1~6위에서 3위인 라가르드만 빼고 모두 미국인이었습니다.

라가르드는 철저한 자기 관리를 해왔습니다. 늘 수영으로 탄탄한 몸매와 체력을 유지합니다. 채식을 하면서 군살이 붙지 않도록 신경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50대까지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20km 이상 장거리로 자전거를 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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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틴 라가르드의 화려한 패션/24셀러브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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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라가르드에게 국가공로훈장을 수여했습니다. 라가르드를 중용했던 사르코지 전 대통령은 올해 프랑스 대선을 앞두고 공개적으로 마크롱을 향해 “재선에 성공하면 라가르드를 총리로 기용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마크롱은 라가르드를 ECB 총재직을 계속 수행할 수 있게 하고 총리에는 여성 테크노크라트인 엘리자베트 보른을 임명했습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라가르드의 사적인 삶에 대해서도 호사가들의 관심이 많았습니다. 장신에 선명한 색상의 에르메스 스카프를 좋아해 패션도 프랑스 여성답게 패션도 화려합니다. 2011년 보그가 라가르드의 패션을 집중 조명한 적 있습니다. 샤넬 정장을 즐겨입습니다. 커다란 브로치로 포인트를 주는가 하면 판초 스타일의 옷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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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월 프랑크푸르트에 찾아온 정은보 당시 금융감독원장과 만난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크리스틴 라가르드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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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가르드는 재무 분야 애널리스트였던 프랑스인 윌프리드 라가르드와 1982년 결혼한 뒤 1992년 이혼했습니다. 시카고에서 로펌에 근무할 때 영국인 사업가와 재혼을 했다가 잠깐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두번째 이혼을 했습니다. 자녀는 첫 남편과의 사이에서 두 아들이 있습니다. 36살인 장남은 외식 사업을 하는 사업가이고 34살인 차남은 건축가입니다. 두번의 이혼 후 라가르드는 두살 많은 이탈리아계 프랑스인 사업가 자비에 지오칸티와 오랫동안 동거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NA 낙방한 대선 후보, ENA 출신 여성 보좌관과 불륜 의혹

라가르드가 ENA에 두번 낙방했다는 건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잘 알려져 있고, 엘리트 양성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됩니다. 그런데 지난해 ‘ENA 두번 낙방생’이 다시 화제가 됐습니다. 올해 봄 치른 대선에서 득표 4위를 한 언론인 출신 에리크 제무르가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겁니다.

작년 9월 주간지 파리마치는 대선 후보로 지지율이 상승중이던 제무르가 바닷가에서 자신의 보좌관인 사라 크나포라는 여성의 어깨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는 장면을 담은 사진을 표지에 게재해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제무르는 자녀 셋을 둔 64세 유부남이고, 크나포는 미혼의 29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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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선 후보였던 에리크 제무르와 그의 35살 어린 여성 보좌관 사라 크나포의 밀회 장면을 보도한 주간지 파리마치 표지./파리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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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무르는 ENA에 두번 낙방한 뒤 기자가 됐던 인물이고, 크나포는 ENA를 상위권 성적으로 졸업해 감사원 소속 치안판사로 임명됐다가 제무르 대선 캠프에 합류한 여성입니다. ENA 낙방생인 유력 정치인과 그보다 35살 어린 ENA 졸업생인 여성 보좌관의 불륜은 커다란 가십이었습니다.

제무르측이 강력하게 사진 보도를 비난하자 파리마치의 편집장은 방송에 나와서 “젊은 여성 에나르크(ENA 졸업생)인 크나포가 대선 후보인 제무르의 선거 캠페인을 주도하는 핵심 인물이기 때문에 취재한 것일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ENA가 얼마나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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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크 제무르의 보좌관이자 내연녀인 사라 크나포./사라 크나포 페이스북


오늘은 라가르드 ECB 총재의 인생을 들여다보면서 ENA를 둘러싼 논란까지 살펴봤습니다. 국가의 엘리트 계층을 양성하는 시스템에 대해 고민해봐야 할 게 많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가 특히 이런 주제에 대해서는 고민할 게 적지 않은 나라라고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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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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