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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단독 인터뷰] "히딩크 '한국축구 혁명' 일으켜"…20년 전 떠올린 '저승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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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티비뉴스=상암동, 박대현 배정호 정형근 기자] 현대축구에서 피지컬 코치가 갖는 비중은 막대하다. 역할은 간명하다. 시차, 고도, 기온, 습도, 이동거리 등 대회장 조건과 선수 체력, 피로도 같은 생체 컨디션을 아울러 고려해 맞춤형 적응 프로그램을 짜고 관리한다.

한국축구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기점으로 피지컬 코치 중요성에 눈을 떴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남긴 유산은 4강 신화라는 위대한 성적뿐 아니라 큰 대회를 준비하는 '시스템 정착'에도 방점이 찍혀 있다.

당시 히딩크 사단 피지컬 코치가 레이먼드 베르하이옌(50)이었다. 베르하이옌은 셔틀런(20m 왕복 달리기)을 적용한 혹독한 체력훈련으로 '공포의 삑삑이' '저승사자'로 불렸다. 출발을 알리는 그의 호루라기 소리에 선수는 혀를 내둘렀지만 개인 특성을 섬세히 고려한 맞춤형 체력 프로그램은 4강 신화 밑거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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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하이옌은 이후에도 한국축구와 연을 이어 갔다. 2006년 독일 월드컵과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태극전사와 호흡을 맞췄고 사상 첫 월드컵 원정 승리와 16강 진출에 크게 기여했다.

지난달 28일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열린 'K리그 유소년 지도자 피지컬 교육'에 베르하이옌이 참여해 눈길을 모았다. K리그 구단 산하 유소년 피지컬 코치를 포함한 지도자 40여 명에게 '전술 원리의 주기화'에 대해 설명하고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스포티비뉴스와 인터뷰에서 베르하이옌은 한국축구와 맺은 인연을 소중한 선물로 여겼다. 황금기로 분류되는 2000년대 대표팀의 뒷이야기를 가감없이 공개했다.

다음은 레이먼드 베르하이옌과 일문일답.

-자기 소개 부탁드린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 대표팀 피지컬 코치였다. 2006년 독일 월드컵과 2010년 남아공 월드컵까지 대표팀과 함께했다. 다섯 번의 월드컵과 유로 대회를 경험했고 세계적인 클럽인 바르셀로나와 첼시, 맨체스터 시티에서도 피지컬 코치로 일한 바 있다.

최근 '풋볼 코치 에볼루션'이라는 코치 교육 단체를 세웠다. 그간의 경험과 깨달은 점을 모두 모아 다음 세대인 어린 축구 코치에게 전수해주고자 설립했다. 단체는 전 세계를 돌며 교육을 진행한다. 이번엔 한국에서 좋은 기회를 얻어 강의를 열게 됐다.

-2002년 당시 한국은 피지컬 코치 개념이 생소했다. 유럽에서도 생긴 지 얼마 안 된 보직이었던 걸로 안다. 한국에 오기 전 당신의 커리어가 궁금한데.

한일 월드컵 전에는 네덜란드축구협회(KNVB)에서 일했다. 프로 및 A급 지도자 라이선스 교육 강사 일을 쭉 했다. 동시에 네덜란드 대표팀 소속으로 (A매치 관련) 업무를 병행했다.

네덜란드가 유로 2000 준결승에 오를 때 스태프였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예선에서 루이 판할 감독을 보좌하기도 했다. 다만 네덜란드가 아일랜드와 최종전에서 패해 월드컵 진출이 무산됐다. 할 일이 사라진 상황에서 히딩크 감독이 한국을 위해 일해보는 건 어떠느냐고 제안했다.

(조국인) 네덜란드가 월드컵 진출에 실패한 건 아쉬웠지만 새로운 기회는 언제나 그런 상황에서 찾아오는 것 같다. 나 역시 덕분에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과 함께 일할 수 있게 됐지 않나. 당시 한국에서 경험은 내 커리어 통틀어 가장 특별한 경험 중 하나로 남아 있다.

-한국축구는 20년 전 당신을 계기로 피지컬 코치 중요성에 눈을 떴다. 당사자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히딩크 감독은 (한국에서) 일종의 작은 혁명을 일으켰다 생각한다. 그는 자신만의 특별한 코칭 스타일을 지닌 지도자였다. 한국에 각 분야 전문가를 불러모은 장본인이지 않나. 나 역시 그들 중 하나였고.

나 외에도 정말 많은 전문가가 합류했다. 내 생각에 히딩크 감독이 정말 잘한 점은 한국 밖에서 전문가를 데려왔을 뿐 아니라 동시에 한국 코치를 어시스턴트 코치로 기용했다는 거다.
덕분에 한국 코치들도 외국에서 온 전문가에게 배움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이 나중에 동료 (한국) 코치에게 이 방법을 전파하고 가르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된 셈이다. 사실 이런 선순환은 축구계에서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선임된 감독이 사단을 데리고 와 일하다가 계약 끝나면 그냥 떠나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렇게 하면 경험과 지식이 그냥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은 달랐다. 코치진을 꾸릴 때 한국 코치들도 임명해 우리가 지식을 나눠 줄 수 있게 했다. (월드컵을 준비하는 프로세스와 4강 진출 과정에서 비롯된) 경험을 한국 축구계가 오롯이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점에 있어 히딩크 감독이 굉장히 좋은 결정을 했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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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당신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내가 맡은 역할은 정확히 '피지컬 코치'였다. 선수들 피트니스 레벨을 끌어올리는 게 주목표였다. 히딩크 감독은 한국 부임 1년차인 2001년에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팀과 친선전을 치르고자 했다. 계획을 면밀히 세웠다. 프랑스와 브라질, 체코 등과 경기를 추진했다.

강팀과 경기를 치르면서 히딩크 감독은 한국 대표팀의 잠재적 문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상대가 너무 강력해 약점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문제점 가운데 하나가 체력이었다. 당시 한국은 정말 빠른 템포의 경기를 구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빠른 템포를 90분 내내 유지할 체력이 부족했다. 첫 60분간은 (빠른 템포) 유지가 가능한데 이후 30분은 조금씩 템포가 떨어지는 현상이 뚜렷했다.
내 할 일은 거기에 있었다. 대표팀의 '마지막 30분' 경기력을 향상시키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90분 내내 높은 템포를 유지한 채 경기를 마칠 수 있도록 하는 게 임무였다. 필요하다면 추가시간까지도 (빠른) 템포를 유지할 수 있게끔 체력을 만들어야 했다.

-2002년 성공 이유를 무엇이라 보는지.

성공 이유는 '플레이스타일'에서 찾고 싶다. 2001년 히딩크 감독과 핌 베어백 코치는 수비수 4명을 세우는 새로운 플레이스타일, 즉 포백 도입을 시도했다.

4명의 수비수와 3명의 미드필더·공격수로 팀을 꾸리면 아무래도 (좀더) 지역방어적인 성격이 강해지게 된다. 직접 맞닥뜨리는 상대 선수가 없기 때문에 선수 입장에선 (스리백보다) 조금 어려운 스타일이 될 수 있다. 공간을 수비하는 개념인 탓이다.

당시 몇몇 한국 선수는 공간을 수비한다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들에겐 한 명의 적을 수비하는 대인방어가 더 익숙했을 것이다.

그래서 히딩크 감독은 스리백을 재도입했다. 3-4-3으로 전술을 새로 짠 것이다. 이 대형은 리스크가 굉장히 크고 또 (선수에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 실제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선 팀 컨디션이 정말 좋아야 했다. 전체적인 전술 이해도가 높아야 구사가 가능한 플레이스타일이었다.

(그럼에도) 당시 한국이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던 첫 번째 이유로 3-4-3 포메이션을 꼽고 싶다. 경기장 내 모든 위치에서 1대1 마크를 붙였는데 이게 통했다. 포르투갈과 이탈리아, 스페인 같은 팀이 한국의 강한 압박에 많은 애를 먹었다.

당연히 내 역할은 선수들이 그런 스타일의 플레이를 90분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었다. 가장 큰 난관은 당시 대부분 한국 선수가 월드컵이 첫 경험이었단 점이다. 심지어 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이지 않았나. 기대치가 굉장히 높은 상황이라 그런 부문도 불안감으로 작용했다.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발전하고 있구나'는 (꾸준히) 느낄 수 있었다. 잉글랜드, 프랑스 같은 강팀을 상대할 때 특히 느꼈다. 선수들이 새로운 플레이스타일을 90분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몸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걸 뚜렷이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걱정은 됐다. 실제 월드컵에 돌입해 폴란드를 만나기 직전에도 의문 부호가 여전했다. '선수들이 과연 이 높은 기대치에서 생기는 압박감을 잘 이겨낼 수 있을까' 이 의문이 가장 컸다.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하지만 한국 선수들은 완전히 처음 경험하는 상황에서도 높은 수준의 경기력을 보여 줬다. 보통은 (처음 마주하는 상황에선)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실패 이후에 점차 발전해 나중에 큰 성공을 거두는 경우가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한국은 곧바로 성공을 거뒀다. 이 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은 어땠나. 2002년 때와도 비교해달라.

스쿼드 측면에서 2006년은 2002년 멤버와 거의 달라진 게 없었다. 하나 월드컵 16강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당시 우리는 토고를 (2-1로) 꺾었고 프랑스와 1-1 무승부를 거둬 2경기에서 승점 4를 확보한 상태였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16강이 눈앞인 조건이다. 최소 조 3위나 2위로 토너먼트에 진출할 수 있는 여건이니까.

하지만 내 기억이 맞다면 당시 승점 4를 확보한 팀이 세 팀이었다. 한국과 프랑스, 스위스가 승점이 같았다. 득실차에선 (한국이) 스위스에 밀린 상황이었고.

그래서 한국은 마지막 경기서 반드시 승리해야 할 상황이었다. 스위스는 무승부만 거둬도 16강에 오르는 상황이었고. 결국 리스크와 부담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스위스에 패했다. 운이 많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2006년을 떠올릴 때 또 다른 (인상 깊은) 기억은 2002년 월드컵에서 뛴 선수들이 2006년에는 한국에서 슈퍼스타가 된 점이었다. 그때 선수들 인기가 대단했다. 연봉도 높고 광고 등을 통해 많은 돈을 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2006년 월드컵 준비를 시작할 때 4년 전과는 (분위기가) 꽤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선수들은 2002년에 비해 좀더 편안해 보였다. 2002년에는 처음 겪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선수들이 스스로를 더 강하게 몰아쳐야만 했다. 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이기도 했고. 그런 면에서 볼 때 2006년은 조금 달랐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운이 따라주지 않은 게 (16강 진출 좌절에) 큰 영향을 미쳤다 생각한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선 원정 16강 쾌거를 이뤘다. 피지컬 코치로서 비결을 꼽는다면.

2010년에는 새로운 세대가 등장했다. 당시 선발된 선수를 보면 처음 월드컵을 경험하는 선수가 대부분이었다. 2002년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볼 수 있다. 생애 첫 월드컵 무대이니만큼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우루과이와 16강 전도 (결과가) 많이 아쉽다. 경기 종료를 약 10분을 남겨두고 동점골을 내준 걸로 기억한다. 한국이 강하게 몰아부치던 상태였고 우루과이보다 좋은 경기를 펼치고 있었다. 루이스 수아레스 슈팅이 굴절돼 들어갔던 것 같은데 이 역시 운이 조금 안 따라주지 않았나 싶다.

한국은 그 경기에서 손쉽게 승리를 챙길 수 있었다. 특히 추가시간 경기력이 좋았다. 물론 사상 첫 (월드컵) 원정 16강이라는 기록을 세운 것만으로도 굉장히 인상 깊은 성과다. 그럼에도 8강까지 나아갈 수 있었는데 간발의 차로 떨어졌다 생각한다. 2010년 대표팀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라 생각한다.

※스포티비뉴스의 베르하이옌 단독 인터뷰는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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