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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필리핀, 中뒤통수 쳤다…대이은 악연에도 '親美 유턴' 마르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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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지난 22일 미국 뉴욕에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왼쪽)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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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드 봉봉 로무알데스 마르코스 주니어(64) 필리핀 대통령이 중국의 마음을 애타게 하고 있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임 정부의 친중 노선을 이어갈 것이란 예상을 깨고 미국과의 관계 강화를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지난 22일(현지시간) 뉴욕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뒤 “우리 지역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있어 미국의 역할이 높은 가치로 평가되고 있다”며 “필리핀은 당신의 파트너이며 동맹이자 친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남중국해에서의 항행과 비행의 자유에 대해 강력한 지지 의사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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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미국 뉴욕증권거래소를 방문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이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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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시작한 미국 방문 일정 첫날 뉴욕 증권거래소를 방문해서는 “필리핀은 언제나 위기에 처했을 때 미국을 바라본다”며 “미국이 동반되지 않은 필리핀의 미래는 상상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야말로 중국 보란 듯 거침 없는 ‘친미 행보’다.

미국은 지난 6월 30일 취임한 마르코스의 첫 비(非)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방문국이다. 전임 두테르테와 달리 취임 직후 미국을 최우선 순방지로 택하며 필리핀 외교 전통을 부활한 것이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취임 직후 첫 해외순방국으로 중국을 선택하고 “필리핀은 미국과 분리된 나라”라고 선언한 뒤, 재임 기간 한 번도 미국을 방문하지 않았다.



“美와 동반하지 않는 미래 상상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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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미국 뉴욕에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오른쪽)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사진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 페이스북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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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스타 등 현지 매체는 마르코스 대통령이 미국 방문 중에 언급한 ‘지역 평화’와 ‘필리핀의 위기’는 최근 심화하고 있는 중국과의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과 대만 갈등 문제를 뜻한다고 분석했다. 또한 ‘항행의 자유’는 미국이 남중국해와 대만해협에서 중국을 견제할 때 주로 쓰는 표현이다. 이에 대한 적극적 지지를 표명했다는 건 향후 필리핀이 해당 문제에선 사실상 미국 편에 설 것을 분명히 한 것으로 풀이된다.



‘친중’ 두테르테와 연합한 마르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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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 두테르테 필리핀 부통령(왼쪽)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이 지난 6월 30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함께 손을 잡고 지지자들에게 환호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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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마르코스 대통령이 지난 5월 대선에서 당선될 당시만 해도 그가 친중 행보를 보일 것이란 예측이 많았다. 부통령 선거에 나온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장녀 사라 두테르테를 러닝메이트로 맞이해 선거를 치렀기 때문이다. 실제 마르코스는 유세 과정에서 “두테르테 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대중) 포용 정책이 비판받지만 가야 할 길”이라며 전 정권의 중국 정책을 공개 지지했다.



법원 판결로 15년간 미국 못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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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마르코스 시니어(오른쪽)와 아들 마르코스 주니어의 1972년 모습.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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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도 마르코스는 중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미 외교전문지 ‘더 디플로맷’은 “1975년 아버지 마르코스 시니어 대통령이 집권 시절 중국과 수교를 한 인연으로 마르코스는 필리핀 일로코스노르테에서 주지사를 지낼 때 중국과 좋은 사업 및 정치 관계를 맺어왔다”고 전했다.

반면 미국과는 ‘악연’이 있다. 지난 1995년 하와이 지방법원은 아버지 재임 시절(1965~1986년) 마르코스 일가가 모은 20억 달러(약 2조8200억원)의 재산을 독재 치하에 고통받은 피해자에게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필리핀 하원의원이던 마르코스는 이를 거부하다가 법정모독죄까지 선고받았다. 이 판결로 인해 1997년 이후 15년째 미국을 방문하지 못했다. 이번 방미도 “국가 원수는 외교적 면책권을 지닌다”는 미국 정부의 유권 해석 덕에 가능했다.



경제와 반중정서에 美 구애하는 마르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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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4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한 시민이 중국 오성홍기에 "중국은 서필리핀해에서 나가라"는 구호를 적어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 필리핀에서 서필리핀해로 부르는 남중국해에 대해 네덜란드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는 지난 2016년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에 근거가 없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중국은 여전히 남중국해가 자신의 영해라고 주장하고 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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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스의 예상 밖 친미 행보엔 경제가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는 ‘경제난 타개’와 ‘필리핀의 싱가포르화’를 주요 정책으로 내걸고 있다. 이를 위해 미국의 경제 지원이 절실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실제 마르코스 대통령은 지난 20일 유엔총회 연설에서 “필리핀 건국 초기 경제 성장 동력은 미국 기업에서 나왔다”며 미국의 투자와 경제협력 강화를 요청했다.

필리핀 국민 사이에서 커져 있는 ‘반중 정서’를 고려한 행보라는 분석도 나온다. 더 디플로맷은 “필리핀인들은 필리핀 해역을 가로질러 은밀히 침투하는 중국의 존재에 대해 초조해한다”며 “마르코스는 국내에 만연한 반중국 정서를 고려할 때 전임자처럼 중국과의 노골적인 우호 관계를 이어가면 위험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를 뒷받침하듯 이번 유엔총회 연설에서 마르코스 대통령은 “남중국해 논란 등은 국제법의 예측 가능성과 안정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을 향해 구단선(중국이 주장하는 남중국해 해상 경계선) 영유권을 인정하지 않은 2016년 국제상설재판소(PCA) 판결을 수용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불편한 중국…동남아 미·중 구도 격변 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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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필리핀을 방문한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과 환담하고 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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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필리핀의 행보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류젠차오(劉建超)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부장은 21일 “필리핀과 미국 양국 간의 관계에 아무런 이견이 없다”면서도 “우리와 필리핀의 관계는 긴 여정을 함께하고 있으며 마르코스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필리핀 정부와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필리핀의 외교 노선 변화는 동남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중 대결 구도에 변화를 몰고 올 전망이다. 미·중 양국의 외교전은 필리핀뿐 아니라 동남아 전체에 걸쳐 이뤄지고 있다. 중국은 ‘일대일로(一帶一路, 육·해상 실크로드)’, 미국은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의 ‘글로벌 인프라·투자 파트너십’(PGII)과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로 아세안 국가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필리핀의 과감한 행동이 격화되는 미·중간 대결 구도를 흔든다면 줄타기 외교 속에 이득을 취했던 다른 동남아 국가들도 ‘선택의 시간’에 내몰릴 수 있다.

이승호 기자 wonder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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