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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일)

이슈 탈레반, 아프간 장악

탈레반 귀환 1년… '절망의 나라'로 회귀한 아프간 [세계의 분쟁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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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탈레반 대원들이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옛 미국대사관 건물 앞에서 아프간 재점령 1주년을 자축하며 깃발을 흔들고 있다. 카불=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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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15일(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 대통령궁 곳곳에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조직 탈레반의 깃발이 내걸렸다. 수도에 무혈입성한 탈레반은 “아프간에서 전쟁은 끝났다”며 승리를 선언했다. 친(親)서방 성향의 아프간 정부는 저항할 의지조차 없었다. 이들은 “평화롭게 정권을 넘기겠다”며 누구보다 빠르게 백기를 들었다. 7년간 아프간을 이끌었던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은 혼비백산하며 인접국으로 도피했다. 같은 시간, 카불에 위치한 미국대사관에서는 성조기가 내려갔다. 2001년 10월 시작된 아프간 전쟁 20년의 마침표를 찍는 상징적 장면이다.

곧바로 과도정부 구성에 나선 탈레반은 국제사회에 “고립된 상태를 원하지 않고 평화로운 국제관계를 원한다”는 유화 메시지를 보냈다. “히잡(머리카락과 목을 가리는 헤어 스카프)을 쓴다면 여성은 공부할 수 있고 직업도 가질 수 있다”며 여권 존중을 강조하기도 했다. 여성 교육 및 취업을 대부분 금지하는 극단적 통치로 국제적 비난을 받았던 1996~2001년 1차 집권 시기와 달라진 ‘탈레반 2.0’을 예고한 셈이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장밋빛 전망’은 물거품이 됐다. 여성들은 교육받을 권리도, 일할 권리도, 혼자 여행 다닐 권리도 모두 빼앗겼다. 인도주의적 위기는 더욱 커졌다. 서방의 경제 제재에 더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불러온 글로벌 경제 위기, 가뭄과 지진 등 자연재해까지 겹치면서 국민 대부분이 기아 위기에 빠졌다.

탈레반이 아프간 영토를 손에 넣은 지 1년. 인권 시계가 다시 20년 전으로 되돌아간 데다 굶주림이 일상이 된 아프간은 또다시 ‘절망의 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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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에서 탈레반의 지도자 회의인 '지르가'가 열리고 있다. 이날 회의에는 정치 지도자와 종교 학자 등 2,000여 명이 참여했다. 칸다하르=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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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이 드러낸 ‘탈레반 본색’


‘전체주의 무정부 국가’ ‘요원한 정상국가화(化)’ ‘실패 국가’.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간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보편적 규범을 지키는 정상 국가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국제사회의 기대와 다르게, 이들은 지난 한 해 탈레반 본색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과거로 회귀했다.

당장 나라 이름부터 그렇다. 이들은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뒤에 ‘공화국’이라는 단어를 지우고 ‘에미리트’를 붙였다. ‘아프가니스탄 이슬람에미리트(Islamic Emirate of AfghanistanㆍIEA)’는 1차 집권 당시 국명과 같다.

‘이슬람주의’와 ‘부족주의’ 향을 짙게 내뿜는 이 이름은, 선거로 지도자를 뽑는 공화국이 아니라 종교적 최고 지도자가 정권을 갖는 정치 체제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통치이념 역시 1차 집권 시기와 마찬가지로 이슬람 샤리아법(종교법)에 기반했다.

정치 체제도 과거와 달라지지 않았다. 국가 원수이자 최고지도자는 전임자의 사망이나 사임 시 30인으로 구성된 지도위원회에서 선출된다. 지도위원회는 최고지도자의 자문 및 주요 정책에 대한 심의 기구다. 이런 체제하에서 현 최고지도자인 하이바툴라 아쿤드자다는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 같은 방식은 민주주의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가 채택하고 있는 ‘온건 이슬람주의 체제’와도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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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장악 1주년을 맞은 15일 수도 카불의 옛 미국대사관 건물 앞에서 한 탈레반 대원이 경계를 서고 있다. 카불=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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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언에 그친 여성인권 존중


정권을 탈환하며 내걸었던 수많은 약속은 공언(空言)에 그쳤다. △인권 보장 △포용적 정부 구성 △협치(거버넌스) 확대 등 국제사회가 요구했던 정책은 대부분 묵살됐다. 인권 상황은 최악이다. 특히 여성 권리는 사실상 바닥으로 떨어졌다. 여성들은 노동ㆍ교육 등 공공 영역에서 지워졌다. 탈레반이 재집권 후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여성부’를 없애고 ‘권선징악부’로 바꾼 것이다. TV앵커를 포함해 모든 여성들은 공공장소에서 얼굴을 부르카(온몸을 가리는 이슬람 복식)로 가려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남성 보호자 없이는 72㎞ 이상 장거리 여행도 금지됐다. 여성 공무원은 모두 해고됐고, 여성들은 학교, 병원 등 일부 기관에서만 제한적으로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최근 탈레반은 “빵(먹거리)과 일, 자유를 달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여성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기도 했다.

소녀들은 가장 큰 피해자가 됐다. 여아 두 명 중 한 명(46%)은 학교에 가지 못하는 상황에 놓였고, 10명 중 9명(약 88%)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조혼을 강요받았다. 이들의 교육과 취업의 기회가 박탈된 점을 감안하면, 중·장기적으로 아프간의 인적 자본(human capital)이 점점 고갈될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언론도 암흑기를 보내고 있다. 국경없는기자회에 따르면 탈레반 재집권 이후 3개월 만에 아프간 언론의 43%가 문을 닫았다. 언론인 수는 1만여 명에서 4,000여 명으로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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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한 여성이 눈 부분을 빼고 전신을 모두 가리는 의복인 부르카를 착용하고 있다. 카불=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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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절반 이상 ‘극심한 기아’


정상국가의 길에서 벗어나고 인권을 외면한 대가는 가혹했다. 국제사회는 줄줄이 ‘돈줄’을 막았다. 탈레반 재집권 이후 미국을 포함한 상당수 국가는 아프간 정부의 해외 자산 90억 달러(약 10조8,000억 원)를 동결했다. 국내총생산(GDP)의 45%에 달하는 연간 80억 달러 해외 원조도 끊겼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경제학자들은 아프간 경제가 지난해 8월 대비 20~30% 수준으로 후퇴했다고 보고 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제재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건 아프간 국민들이다. 서민들의 삶은 전시(戰時)나 다름없다.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최근 보고서에서 “아프간 인구의 90% 이상이 1년 동안 식량 불안정 위기를 겪었다”며 “수백만 명의 어린이가 급성 영양실조로 고통받고 있고, 심각한 장기적 건강 문제 위협을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프간 인구 58%인 2,000만 명은 극심한 기아 상태에 있고, 5세 미만 어린이 100만 명 이상은 장기간 급성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물가 폭등은 경제난에 기름을 부었다. 인구 70%가 식량과 생필품을 살 여유가 없는 상태다. 생계를 위해 장기밀매를 하는 주민도 속출했다. 자연재해도 국가적 재난이 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남동부에 1,15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강진마저 발생했는데, 탈레반은 복구 작업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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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아프가니스탄 서부 헤라트 외곽의 한 난민 캠프에서 탈레반을 피해 고향을 등진 여성이 아이를 안고 있다. 헤라트=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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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은 ‘심리적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당장 먹거리가 없어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지만 껍데기뿐인 정부에 기댈 수도 없는 탓에 각자도생에 나서는 분위기다. 대표적인 게 늘어난 양귀비 재배다. 탈레반 정권은 “마약에 의존한 지하 경제와는 거리를 둘 것”이라며 헤로인 원료인 양귀비 재배를 공식 금지했지만, 경제난에 직면한 아프간 농부들은 밭을 뒤엎고 양귀비를 심고 있다. 지난해 11월 유엔 마약범죄국에 따르면 아프간의 아편 생산량은 2020년에 비해 8% 늘어난 6,800톤에 달한다.

혼란 속 세력 불려가는 이슬람 극단주의


혼란을 틈타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아프간에 둥지를 틀고 있는 점도 문제다. 특히 이슬람국가(IS)의 아프간 분파조직 ‘호라산(IS-K)’은 가장 큰 위협이다. 이들은 지난 3, 4월 라마단 기간 아프간 북부 시아파 모스크(이슬람 사원)에서 연쇄 폭탄테러를 일으키며 100명 가까운 사망자를 냈다.

지난달 말 알카에다 수장인 오사마 빈 라덴의 후계자, 아이만 알자와히리가 미국 중앙정보국(CIA)에 의해 사살됐는데, 미국 정부는 그가 탈레반 정권과 내통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탈레반이 국제사회와의 약속을 어기고 테러조직 수장을 비호해 온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들의 국제사회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테러는 사회 불안정과 굶주림에 내몰린 민심, 국제사회의 무관심을 자양분 삼아 차츰 악의 뿌리를 내린다. ‘인도주의적 대재앙(humanitarian catastrophe)’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도주의적 지원이 절실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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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률 전 명지대 교수·전 한국중동학회 회장


정상률 전 명지대 교수/ 전 한국중동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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