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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우리만 갇혀 있다”…정신질환 재발 때까지 ‘방역 고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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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커버스토리ㅣ코로나19 속 정신장애 그룹홈 가보니

재활시설 당사자 3인에게 듣는 ‘코로나’


2년 넘게 폐쇄병동처럼…정신질환 재발로 병원행도

당국 지침·사회 분위기에 말도 못꺼낸 채 고립


한겨레

재활 당사자 ‘김 대리’(별칭)는 공동생활가정에서 지내다 코로나19 감염이 아닌 정신질환 재발로 지난달 초부터 한달 동안 병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지난 8일 만난 김 대리의 모습.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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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살아 계실 것 같아.”

이 선생은 부엌 한쪽을 응시했다. 머뭇거리다 혼잣말이 나온다. 오물거리는 입속에서 말들이 씹힌다. 그러다 “엄마”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코로나로 오랫동안 밖을 나가지 못했잖아요. 무엇을 가장 하고 싶으셨어요?

“엄마, 엄마가 보고 싶어.”

올해 예순여덟인 이 선생을 수도권 한 소도시의 정신재활시설인 공동생활가정(ㄱ그룹홈)에서 만난 건 7월13일, 8월3일, 8월8일 세차례였다. 같은 기회에 이 선생처럼 정신질환을 관리하며 ㄱ그룹홈에서 함께 지내는 김 대리(29살·7월13일은 입원으로 공석), 박 이사(50살·각각 호칭 및 별칭) 등에게도 코로나19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물었다. 방 네개, 화장실 두개짜리 단층 주택에서 ㄱ그룹홈을 운영해온 시설장 이아무개(50)씨가 인터뷰를 도왔다. 기사에 등장하는 이름과 관련 지명은 개인정보 노출을 우려한 ‘당사자’(‘환자’를 일컫는 말) 요청으로 익명으로 처리했다.

TV 속 바깥세상은 ‘위드코로나’인데…


이 선생은 종종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예 못 나가셨다고요?

“나가지 말라고 하니까. 나만 그랬나! 김 대리, 박 이사 다 마찬가지지. 하루 종일 여기서 그냥 있었지. 어떡해, 그럼.”

정부는 코로나19 초기인 2020년 3월 초 ‘정신질환’이라는 범주로 묶을 수 있는 모든 시설(병원, 요양시설, 정신재활시설 등)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경북 청도대남병원 폐쇄병동 정신질환자 대부분이 확진 판정을 받은 뒤다. ㄱ그룹홈이 사실상 (예방적) 코호트(동일집단) 격리에 들어간 것도 그해 3월12일, 중앙방역대책본부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대응지침(지자체용) 제4-1판’을 각 시·도에 내려보낸 직후다. 시설 내 외부인 방문이 전면 금지됐다. 시설장도 타인과 악수 등을 통한 접촉 금지 등 근무시간 외 자가격리 수준의 방역수칙을 지켜야 했다.

두달 뒤인 5월 거리두기 준수를 전제로 소규모 모임이 허용됐지만, 이후 네차례 대유행 속에 확진자 수가 증가하면 어김없이 외부 접촉이 제한됐다. 현실적인 규제를 차치하고서라도 확진자가 나올 경우 무증상·경증 확진자까지 정신병원에 격리 조치되는 등 시설 당사자의 심리적 부담도 컸다. 그 속에서도 주 1회 또는 2회 피시아르(PCR·유전자증폭) 검사를 전제로 재활(치료) 명목의 외부활동이 가능했다. 그조차도 가로막힌 건 지난해 7월이다. 이때 ㄱ그룹홈 인근 주간재활시설까지 비대면으로 전환됐다. 그곳은 작업·기술 지도, 직업·취업 훈련, 사회 적응 훈련 등 당사자 재활을 위한 시설이었다. “(코로나19 초기와 같은) 감옥이나 다름없는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그때부터다. 40년 만에 폐쇄병동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정신재활시설에서 사회 적응 훈련을 하던 이 선생도, 이제 겨우 환청 등 증상에서 자기 관리에 익숙해진 1년 차 김 대리도, 혼수상태로 빠져들게 하는 우울증을 딛고 주간재활시설 당사자 대표까지 맡으며 외부활동에 열심이던 박 이사도 코로나19로 이때 완전히 발이 묶였다.

ㄱ그룹홈과 같은 경험을 함께한 이들은 얼마나 될까. 정확한 수치는 잡히지 않는다. 우선 2020년 국회 국정감사에 보건복지부가 제출한 자료를 보면, 정신의료기관 및 정신요양시설 입원·입소자는 2019년 기준 8만8509명이다. 이들 속엔 6천명 남짓한 정신재활시설 이용자 수는 포함돼 있지 않다. ㄱ그룹홈처럼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는 미인가 시설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난다. ㄱ그룹홈의 경우, 시 정신건강증진시설에서 10년 이상 근무한 정신보건전문요원이 시설장으로 2년 동안 운영해왔지만, 여전히 시는 보조금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당사자 수 또한 정확하지는 않다. 다만 이 선생과 김 대리 같은 조현병 당사자는 인종과 지역을 불문하고 유병률이 1%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의료계에선 조현병을 가진 이들이 전국에 약 50만명이 있을 것으로 추산한다. 여기에 박 이사처럼 기분장애로 치료를 받는 이의 수가 지난해 100만명(건강보험공단 기분장애(F30~F39) 진료 데이터 기준)을 넘어섰다는 통계를 더하면, 그 수는 150만명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ㄱ그룹홈도 고립된 이들을 위해 나름의 분투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한겨레>가 ㄱ그룹홈으로부터 확인한 2021년 공동생활가정 사업평가서를 보면 “(스트레스 등) 이를 해소하기 위해 (거리두기를 준수하며) 주기적 산책, 등산, 면담이나 나들이를 실시했음”이라 돼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단기적 효과가 있을 뿐 궁극적인 해결 방법은 되지 못했음. 모든 사회적 약자들이 그렇듯 정신질환자도 외부활동을 통한 회복이 중요함”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박 이사는 “특히 지난해 가을부터는 텔레비전 속 바깥세상은 위드코로나인데, 우리만 갇혀 있는 것 같아 혼란스럽기까지 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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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무개 시설장(왼쪽)이 재활당사자 ‘이 선생’의 체온을 재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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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 없는 투약’만 거듭할 수밖에


셋은 외부활동이 금지됐던 지난해 7월부터 올해 5월까지 ‘감옥 같은’ 열달을 어떻게 버텨냈을까.

“원래 공동생활가정이 주로 하는 일이 약 복용과 일상생활 관리인데, 별다른 지원도 없는데다 외부 출입이 제한되고 주간재활시설까지 비대면 활동으로 전환하니, 시설과 회원들도 각자도생하는 수밖에요.”(이 시설장)

그래도 살아진다. 인터뷰 도중 이 선생이 텔레비전을 가리키며 웃었다. “최불암 알아?” 왼손으로 양볼을 매만지자 하얗게 해진 소파 손잡이가 드러났다. 이 선생은 세차례 인터뷰 내내 텔레비전 앞 소파를 벗어나지 않았다. “(최불암이) 8사단 10연대 3중대 출신 사단 사진병이었거든. 내 군대 동기”라고 했다. “이 선생과 연배가 다르다”는 말에, “최불암을 몰라서 하는 소리”라며 정색을 했다. 폐쇄병동에 있던 40년 동안, ‘군대 동기 최불암’은 수사반장, <전원일기> 양촌리 마을회장을 거쳤고, 지난 열달 전국 곳곳으로 그를 안내했다. 거실 소파 왼편 딱 거기에 앉기만 하면 됐다. 박 이사는 조금 더 정밀한 세계로 은신했다. 그의 방 전자피아노 앞엔 ‘하농 39번’ 악보가 놓여 있다. 하농은 박자와 음정이 음계별로 반복되는 피아노 교본이다. “손가락 연습일 뿐”이라고 했지만, 반복을 강박적으로 좋아하는 그를, 하농은 세상 저편 ‘반복과 정렬’ 속으로 데려갔다. 발병 전 그는 대기업 공장의 생산 프로세스를 책임지는 중소기업 이사였다. 과거와 현재, 안과 밖은 하농으로 연결되곤 했다. 김 대리도 안식처가 있었다. 커피였다. 점심 식사 뒤 얼음을 한가득 담은 1리터짜리 큰 물통에 봉지 커피 8봉을 쏟아넣고 휘젓고, “디카페인”이라면서 통을 ‘솨악솨악’ 흔든다. 그의 열달엔 더한 운이 따르기도 했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을 통해 물류센터의 업무를 처리하는 4시간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이 시설장은 “하지만 각자도생도 정도껏”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말 실시한 ‘공동생활가정 만족도 및 욕구 조사’(1년에 두차례 실시)에 “당신이 생각할 때 가장 시급하거나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유롭게 적어주세요”라는 문항 빈칸에는 “단체여행” “외부활동” 등이 등장했다. “위로”라는 단어도 눈에 띈다. 이 시설장은 “누구를 만나고 어디를 가는 것 자체가 묶여 있으니, 바깥활동 자체가 욕구가 됐다”고 설명했다.

바깥에선 정신의료기관 및 정신요양시설 등을 제한하는 방역당국 지침이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 조처가 장기화되는 것에 대한 우려는 진작부터 있었다. 이 시설장은 “보건복지부의 정신건강사업안내 지침을 보면, 공동생활가정 입소자의 외부 프로그램 이용은 의무사항이다. 재활하는 당사자들에겐 투약뿐만 아니라 재활이 뒤따라야 한다”며 “재활의 핵심은 외부활동(및 관계 형성)”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감금과 다름없는 규제가 이어지는 열달 동안 시설 내 당사자 외부활동에 대한 논의는 치료 차원에서든, 인권 차원에서든 지금껏 논의된 바가 없다.

방역지침 부작용에 대한 경고는 ㄱ홈그룹에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2021년 12월 작성된 공동생활가정 사업평가서에는 “코로나19 장기화로 외부 프로그램 제한, 다중시설 이용 제한 등의 정책과 맞물려 입소자들의 사회적 고립과 스트레스 증가로 나타나고 있음. 주로 실내 생활을 하다 보니 회원들이 예민해지거나 우울해지고 스트레스도 높아져서 재발의 위험도 있었다”고 돼 있다. 결국 탈이 났다.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 우리들 말


“우리가 갇혀 있다는 말에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어요. 나가고 싶다는 말조차도 어디다 함부로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우리 옆집도 여기가 어딘지 몰라요.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냥 닫으라면 닫아야 하고, 숨죽여 있으라고 하면 그냥 있어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이젠 그렇게 하지 말고 함께 살자고, 그 얘기를 꼭 하고 싶어요.”(이 시설장)

코로나19 내내 ㄱ그룹홈은 누구도 감염되지 않고 견뎌냈다. 이 시설장은 할 말이 많았다. 결국 “출동한 119 들것에 실려 문턱을 넘은 건 코로나19가 아닌 정신질환 재발 때문”이었다.

“이쪽에서 일한 경력만 15년이 넘었는데, 올해와 작년만큼 주변에서 재발이 많았던 적이 없었어요.”(이 시설장)

시작은 박 이사다. 지난해 11월 박 이사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헛소리에 헛손질까지, 뇌졸중 전조증상인 줄 알았죠.”(이 시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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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 당사자 ‘박 이사’가 생활 수칙에 서명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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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바로 119를 불렀다. 인근 종합병원 응급실로 달려가 엠아르아이(MRI·자기공명영상촬영)까지 찍었다. ‘이상 없음’이 나왔다. 결국 외래 진료를 하던 대학병원으로 차를 돌렸다. 진단 결과는 우울증 재발이었다.

―코로나19가 병을 일으킨 셈이네요.

“우울증이다 보니까, 사람도 만나 대화하고 그러면 아무래도 낫죠. 그것을 ‘환기’라고도 하는데요, 그렇게 스스로 기분을,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해요. 그걸로는 부족하고, 뭔가 의미를 찾아야 하고요. 여러번 재발하면서 얻은 교훈이에요. 그런데 혼자 하는 건 결국 힘에 부치더라고요. 요리도 해보고, 하농이랑 이것저것 해봤지만, 혼자서는 안 되더라고요.”(박 이사)

박 이사가 자기 방으로 돌아와 하농을 다시 잡기까지 한달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박 이사가 병원을 오가는 사이, 이 선생도 부엌 쪽을 향한 혼잣말이 늘어났다. 혼잣말은 조현병을 앓는 이들이 나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원하는 일종의 대용물이라고도 한다. 당사자들은 심적 긴장이 높아지면 그 해소를 위해 혼잣말을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 선생은 투약과 치료에도 소극적으로 변했다. 재발을 앞두고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 중 하나였다. 그렇게 이 선생이 악화되는 사이, 김 대리가 먼저 재발했다. 거리두기가 완화되고, 주간재활시설도 대면 활동으로 전환한 7월 뜨거운 초여름 한낮이었다. 그날, 김 대리는 녹아내릴 듯한 아스팔트 위에서 양복을 갖춰 입고 두 시간여 동안 한자리에 서 있었다. ㄱ그룹홈 인근에서 발견된 그날 이후 김 대리는 폐쇄병동에서 4주를 머물러야 했다. 김 대리 재발에는 지난 4월 누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 것도 이유가 된 것으로 보인다. ‘위드코로나’가 유지되던 외부와 달리 시설 통제는 풀리지 않았다. 그는 “(결혼식에) 갔어야 했는데…”라며 “시설장도 다녀오라고 했다. 하지만 (제한이 풀리지도 않았는데) 나가는 게 부담되고, 엄마가 오지 말라고 하기도 하고”라고 했다.

―증상은 어떤가요. 괜찮아지신 건지요?

“망상과 환청이 들려요.”

김 대리는 재발 뒤 일자리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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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장과 재활 당사자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벽에는 재활 당사자들의 약을 담은 약달력이 보인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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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바람은 이뤄질 수 있을까


“돌파구를 찾아야 해.”

두달 전처럼 다시 시설이 폐쇄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물었더니, 이 선생이 갑작스럽게 툭 내뱉었다. 옆에서 이 시설장이 “며칠 전 지침 내려온 것을 보니 10인 이상 생활시설은 면회 금지, 외부 프로그램 금지로 돼 있다. 슬슬 시동을 거는 것 같다”고 거들었다. 이 선생은 “(바깥과 차단되기 전에) 독립하고 싶다”, “법원 서기 보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이미 은퇴할 나이도 지나버린 그다. 구직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법원이라는 직장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만의 현실에서 희망은 여전했다.

“(서기 보조를 할 필력) 자랑은 아니지만, 내가 쓴 붓글씨가 경매에 부쳐져 가지고 프랑스로 팔려갔거든.”

그가 메모지 한장을 끌어다 프랑스 파리로 팔렸다는 글귀를 썼다. ‘은주야 사랑했노라.’ 이 선생 말이 다 허황된 것도 아니다. 이 선생은 지난 5월부터 주간재활시설에서 이력서 작성 등의 수업을 들었고, 붓글씨도 배웠다. “엄마가 보고 싶다”는 그의 바람은 그 욕망 끝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정작 ‘돌파구’를 찾은 건 박 이사다. 지난 5월 바깥활동 제약이 풀리면서 우울증이 거짓말처럼 날아갔다. “얼마 전부터 다른 정신장애인을 돕는 ‘동료지원가’를 하게 되면서 행복에 대해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정신질환을 앓는 다른 당사자를 찾아 청소부터 심부름, 병원 동행 등 일상을 돕는다. 그리고 오는 가을 아예 ㄱ그룹홈에서 독립할 계획도 세웠다.

“직업은 당사자들을 마법처럼 바꿔놓기도 해요. 직장 속에서 자신의 증상을 관리하고 통제하려고 애를 쓰면서 좋아지기도 하고요.”(이 시설장)

김 대리가 일을 찾고 있는 것도 박 이사와 같은 이유다. 이번에는 재택이 아닌 다른 일을 찾을 것이다. 직업이 재활에 가장 효과가 좋은 방법 중 하나지만, 그 또한 ‘관계’를 전제로 한다.

이들이 말하는 독립과 관련해 ㄱ그룹홈에서 성공 사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년, 2021년 사회로 나간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지역사회에서 자립했고, 한 사람은 가정으로 돌아갔다. 코로나19로 본격적인 통제가 시작되기 전의 일이다.

참고한 책들

<만화로 읽는 조현병> 나카무라 유키 글·그림, 김성우 옮김, 뿌리와이파리

<조현병의 모든 것> E. 풀러 토리 지음, 정지인 옮김, 심심

<우리는 쫌 뾰족한 사람들이야> 김군·송국클럽하우스 지음, 호밀밭

<만성 정신과 환자를 위한 정신재활> 로버트 폴 리버만 지음, 김철권 등 옮김, 하나의학사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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