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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전투,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패배의 교훈 [뉴스원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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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재 외교안보팀장의 픽: 디에프 상륙작전



지금으로부터 80년 전 1942년 8월 19일 오전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의 어업 도시인 디에프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미국과 영국, 캐나다의 연합군 5000여명이 기습 상륙작전을 펼쳤다. 이 도시는 독일의 점령지였다.

중앙일보

디에프 상륙작전에서 패한 캐나다군 포로가 독일군에 끌려가고 있다. 캐나다 기록 보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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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빌리(Jubileeㆍ기념제)라 불리는 작전의 목표는 디에프 항을 점령하고 인근 독일 비행장을 파괴한 뒤 연합국 포로를 구출하는 것이었다. 나치 독일로부터 유럽 대륙을 해방한다는 내용은 주빌리 작전에 단 한 줄도 들어가지 않았다. 규모도 본격적인 유럽 침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주빌리 작전이 어정쩡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1년 전인 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에 쳐들어가면서 소련은 어쩔 수 없이 연합국에 들어가게 된다. 소련의 독재자 요시프 스탈린은 미국과 영국에게 ‘제2 전선’을 열라고 끊임없이 요구했다. 제2 전선은 미ㆍ영이 유럽 대륙을 전쟁터로 만들면, 동부 전선에서 독일과 사투를 벌이는 소련의 짐이 덜어질 것이란 이유에서다.

그런데 미ㆍ영은 제 2전선의 준비가 안 됐다. 태평양에서 일본의 승세를 꺾지도 못했다. 그러나 잇따른 패배로 체면이 땅에 떨어진 영국의 입장에선 군사적 승리에 목말라 했던 터였다. 독일의 방어 태세도 알아보고, 영국과 영 연방국의 상륙작전 능력도 실전에서 검증받아야 한다는 명분도 있었다.

그래서 주빌리 작전은 승인됐고 실행에 옮겨졌다. 하지만 작전은 처음부터 꼬였다. 이른 새벽 해안에 교두보를 확보하려 했지만, 상륙정이 항로에서 벗어났다. 결국 연합군은 경보를 받은 독일군의 포화 속에서 상륙해야만 했다. 게다가 기습작전이라며 함포 사격이나 공중 지원은 작전을 짤 때부터 고려하지 않았다.

일부 연합군은 디에프 시가지에 진입했으나 곧 독일군에 격퇴됐다. 전투는 정오를 조금 넘어 끝났다. 결과는 연합군의 참패였다.

연합군에서 3778명이 전사ㆍ부상했고 1964명이 포로로 잡혔다. 함정 34척이 침몰했고, 항공기 110대가 격추됐다. 독일군의 인적 피해는 591명 전사ㆍ부상에 불과했다. 함정 침몰은 1척뿐이었고, 항공기 격추는 48대였다.

연합군은 이후 상륙작전의 교리를 가다듬었다. 상륙 지점에 대한 정찰을 강화하고, 적을 압도할 함포 사격과 공중 지원을 상륙지점에 쏟아부었다. 그리고 3년 후인 44년 6월 6일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 대규모 상륙작전을 펼쳤고, 결국 45년 5월 8일 독일은 항복했다.

주빌리 작전에서 영국 해군의 지휘관이었던 루이 마운트배튼 경은 나중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디에프 때문에 승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디에프에서 죽은 1명의 목숨은 노르망디에서 10명을 살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를 비롯한 지휘부의 그 누구도 주빌리 작전의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리고 캐나다만이 유일하게 디에프 상륙작전을 기린다.

이철재 외교안보팀장 seaj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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