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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한 양조 문화 지닌 일본… 한국의 음주 문화까지 수출될까? [같은 일본, 다른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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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열도의 술 이야기

편집자주

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토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한국일보

일본은 각 지역의 특색이 골고루 반영된 특산주가 발달되어 있다. 한국에서도 지역 명주가 발달하기를 기대해본다. 일러스트 김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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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특산주를 맛보는 것은 일본 여행의 즐거움

일본 여행의 즐거움 중의 하나가 지역의 특산주를 맛보는 일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지역을 대표하는 술이 없지는 않다. 예를 들어, 제주도는 ‘한라산’, 전라도는 ‘잎새주’, 부산은 ‘대선’, 강원도는 ‘동해’ 등 지역을 대표하는 소주 브랜드가 있다. 또 가평 하면 잣막걸리, 청송 하면 사과막걸리 등 지역을 대표하는 농산물을 활용한 막걸리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일본에는 이렇게 ‘전국구’로 이름을 알린 지역 특산주뿐 아니라, 작은 양조장에서 빚어서 우리나라로 치면 군이나 면 단위의 지역에서만 유통되는 ‘지역구’ 술도 많다. 이런 술들은 소량만 빚기 때문에 물량이 많지 않다. 로컬 음식점이나 숙박업소, 혹은 지역 특산품만 취급하는 대도시의 안테나 숍에서나 접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지도는 낮아도 맛과 향이 뛰어난 술을 빚는 양조장이 적지 않았다. 방방곡곡에 꼭꼭 숨은 명주를 찾아다니는 여행의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요즘에는 한국에서도 일본 술을 쉽게 구할 수 있다. 일식 음식점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일본술을 구비하고 있고, 대형마트나 주류 전문점에서도 일본술을 살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곳에 납품되는 일본술은 대형 양조장에서 출하되는 전국구 브랜드 10여 종에 불과하다. 일본에서 영업 중인 양조장이 1,400여 곳, 출하되는 술의 종류가 1만5,000 종이 넘는다고 한다. 기껏해야 10여 종의 컬렉션에는 아쉬운 마음이 앞선다. 일본의 술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이 칼럼에서 일본의 술이나 음주 문화를 소개한 것이 처음은 아닌데, 애주가의 못 말리는 호기심이라 생각하고 너그럽게 읽어 주시기 바란다.

◇일찌감치 상업화・고급화, 기초 체력이 탄탄한 일본의 양조 문화

우리나라에서는 쌀로 빚은 일본식 청주를 ‘사케(한자로는 酒라고 쓴다)’라고 하는데, 사실 이 단어는 우리말로 ‘술’에 해당하는, 주류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다. 일본에서는 청주를 ‘니혼슈(日本酒, ‘일본술’이라는 뜻)’라고 하는데, 양질의 쌀을 생산하는 니가타(新潟) 등 동북 지역에 손꼽히는 니혼슈 명가가 많다. 한편, 벼농사 인구가 적은 규슈(九州)지방 등에서는 증류주인 ‘쇼츄(焼酎)’를 많이 마신다. 도수가 높은 만큼 얼음이나 온수로 희석하며 마시는데, 술잔에 우메보시(매실절임)를 한 톨 넣어 젓가락으로 살살 풀어가면서 마시기도 한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일본인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제일 많이 마신 주종은 역시 맥주다. 도쿄의 긴자 등 유서 깊은 번화가에는 100년이 넘은 ‘비어홀’이 성업 중이고, 지방에서는 ‘지비루’라고 통칭하는 로컬 맥주를 즐길 수 있다. 맥주나 위스키, 와인 등 서양에서 건너온 술도 일본의 음주 문화의 중요한 축이다. 세계적으로 위스키 원액을 생산하는 나라가 흔치 않은데, 일본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미국, 캐나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5대 위스키 생산국 중 하나다. 고슈(甲州) 등 포도 재배가 활발한 지역에는 80곳이 넘는 와이너리가 있어서, 이곳을 여행하다 보면 마치 와이너리 투어를 하고 있는 듯 들뜬 기분이 되기도 한다.

일본에서 음주 문화가 꽃피었다고 하면 분통이 터진다는 사람도 있을 듯하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 한반도의 가양주(집에서 빚는 술) 전통은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1909년 일제는 근대적인 주세법을 제정하면서, 양조장에 면허제를 도입하고 술에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다. 집에서 술을 빚어 온 우리 문화의 관점에서 보자면, 김치를 담기 위해 면허를 취득해라, 김장을 하면 세금을 내라는 이야기처럼 부조리한 법이었다. 실제로 이 주세령 이후에 우리나라에서는 수많은 전통술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반면, 일본에서는 가마쿠라 시대(12~13세기)에 술을 빚어 판매, 유통하는 상업 형태가 성립했고, 에도 시대(17~19세기)에 이미 근대 주세법과 유사한 형태의 양조장 면허제와 과세 관행이 있었다. 18세기에는 주류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상인이 연대한 조합도 등장했다. 이 시기에 일본을 자주 오갔던 네덜란드 상인에 의해 인도네시아로 일본술을 수출했다는 기록도 있다. 서구화를 적극 지원했던 메이지 정부(1867~1912년)의 부양책에 힘입어 19세기 말에는 맥주 브루어리나 와이너리도 제법 생기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이렇게 양조업의 전문화, 상업화가 일찌감치 진전되어 있었기 때문에, 근대적 주세령의 도입 등 외부 환경이 변해도 버틸 저력이 있었다. 1940년대 이후 일본 열도를 초토화시킨 전쟁과 패전으로 많은 양조장들이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후 일본의 술 문화는 다양화, 고급화에 박차를 가하며 이전보다 더 화려한 모습으로 부활했다. 오랜 역사 속에서 굳게 다져진 양조장들의 기초 체력이 튼튼했기 때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양조장이 건실하다고 해서 다양한 술을 폭넓게 즐기는 음주 문화가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 술을 좋아한다고 해서 아무 술이나 선뜻 마시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런 면에서 니혼슈는 시음 욕구를 효과적으로 자극하는 시스템을 갖추었다. 예를 들어, 드라이한 향과 맛은 ‘가라구치(辛口)’, 달콤한 향과 맛은 ‘아마구치(甘口)’라고 분류하는데, 이런 분류가 술을 선택할 때에 도움이 된다. 드라이함과 달콤함의 조합을 수치화한 ‘니혼슈도(日本酒度)’라는 기준도 있다. 평균적인 일본술의 도수인 15%를 기준선으로 삼아서, +(플러스) 수치가 높을수록 가라구치, -(마이너스) 수치가 높을수록 아마구치를 뜻한다. 술맛의 특성에 맞추어 가장 맛있게 마실 수 있는 온도, 함께 곁들이면 좋은 음식 메뉴 등을 함께 안내하는 경우도 많다. 이렇듯 세세한 가이드라인이 한번도 마셔보지 못한 술을 기꺼이 선택하고 맛보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마치 와인 애호가들이 각양각색의 와인을 비교 시음하고 즐기듯, 섬세하게 음미하며 맛을 탐구하는 것이야말로 일본인이 술을 즐기는 방법이다. 낯설었던 니혼슈의 무궁무진한 매력에 빠져들 수 있었던 것은 음주자를 배려하는 친절한 안내 시스템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전국을 돌아다니며 지역 명주를 즐길 날을 기대한다.

최근 일본에서는 희석식 소주나 막걸리 등 한국 술도 큰 인기라고 한다. 소주에 얼음을 넣거나, 막걸리와 탄산수를 섞어 칵테일처럼 즐기는 것이 요즘 일본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스타일이다. ‘원샷’을 부르짖는 술꾼의 성에는 차지 않을지 몰라도, 이 역시 다양한 주종을 포용하는 일본 음주 문화의 단면이다. 예전에 한류 드라마의 팬을 자처하는 한 일본 대학생이 “한국 드라마의 주인공은 화가 날 때마다 초록색 병의 술을 한입에 털어 마신다”는 남다른 고찰을 들려주어서 쓴웃음을 지은 적이 있다. 홧김에 희석식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는 음주 문화까지 수출할 일은 아니지 않겠는가? 요즘은 한국에서도 집에서 술을 빚는 가양주 애호가들이 늘어나고, 수제 맥주나 수제 막걸리, 다양한 전통술 등이 특히 젊은 층에서 인기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전국을 돌아다니며 지역 명주를 즐길 날이 머지않았으리라. 애주가의 기대가 크다.

김경화 미디어 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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