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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英 총리 경선에 부는 대처 열풍 [글로벌 이슈/하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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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1979년 모습(왼쪽 사진). 차기 총리를 뽑는 집권 보수당의 대표 경선에서 지지율 선두를 달리는 리즈 트러스 외교장관 또한 지난달 15일 43년 전 대처와 유사한 검은 재킷, 리본 달린 흰 블라우스를 입었다. 유튜브 화면 캡처·런던=AP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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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민 국제부 차장


다음 달 5일 탄생할 새 영국 총리를 뽑는 집권 보수당의 대표 경선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장수 총리인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의 열풍이 불고 있다. 최후의 2인으로 남은 리즈 트러스 외교장관과 리시 수낵 전 재무장관은 물론이고 탈락한 페니 모돈트 국제통상부 부장관, 나딤 자하위 재무장관 등도 모두 자신이 대처의 후계자라며 정책, 노선, 옷차림, 말투 등을 모방하고 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가 “대처의 유령이 돌아다닌다”고 평했을 정도다.

트러스 장관과 수낵 전 장관은 대놓고 아바타를 자처한다. 대처(1979∼1990년 집권), 테리사 메이(2016∼2019년 집권)에 이은 세 번째 여성 총리를 꿈꾸는 트러스는 감세, 작은 정부, 반중·반러 외교 등 대내외 정책뿐만 아니라 복장까지 따라 한다. 그는 최근 공식석상이나 TV토론 등에서 짙은 색 정장 재킷에 큰 리본이 달린 흰색 블라우스를 유니폼처럼 입고 있다. 대처의 집권을 가능케 한 1979년 4월 총선 당시 대처가 선거 방송에 입고 나왔던 옷과 똑같다.

현재 지지율 선두인 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인 올 2월 중순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러시아를 찾았다. 이때 대처가 1987년 옛 소련을 방문했을 때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입었던 것과 비슷한 모피 코트와 털모자를 착용했다. 그가 지난해 말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에스토니아를 찾아 탱크에 오른 모습도 냉전이 한창이던 1986년 당시 대처가 서독을 방문해 탱크를 탔던 것과 유사하고, 농가를 찾아 갈색 점박이 어린 소와 포즈를 취하며 서민 이미지를 강조한 모습도 판박이다. 언어 전문가들은 그가 대처 특유의 길고 느린 말투도 따라 한다고 평한다.

인도계인 수낵 전 장관은 텔레그래프 인터뷰에서 “대처주의자로 총리직에 도전하고 있으며 집권 후에도 대처주의자로 영국을 이끌겠다”고 했다. ‘나’는 없고 ‘대처’만 있다. 인도 정보기술(IT) 대기업 인포시스를 창업한 나라야나 무르티의 사위인 그는 장인이 44억 달러(약 5조7200억 원)의 재산을 지닌 대부호인데도 그의 딸인 자신의 부인이 비(非)거주 비자를 이용해 푼돈의 세금을 탈루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이 반서민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 어린 시절 약사 모친을 도우며 용돈을 번 경험이 잡화상 딸인 대처와 유사하다고도 주장한다.

나름 잔뼈가 굵은 두 정치인이 이렇듯 노골적으로 무덤 속 대처를 소환한 이유는 보수당 대표 선출이 전 유권자가 아닌 당원 16만 명, 즉 ‘집토끼’를 대상으로 한 선거이기 때문이다.

보수당원은 영국 평균에 비해 고연령 고소득의 백인 남성이 많아 우파 색채가 강하다. 대처의 대표 정책인 공공주택 민영화, 금융업 활성화 등으로 집을 소유하고 자산 증식의 혜택까지 입은 대표적 계층이다. 이들에게 ‘정치적 남편’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과 자유세계의 지도자로 군림하고 아르헨티나와벌인 포클랜드전쟁까지 승리로 이끈 대처는 잘 먹고 잘살게 해 줬을 뿐 아니라 국가의 자긍심까지 높여준 유일한 지도자인 것이다.

그의 탄광 및 철도 노조 탄압 등으로 피해를 본 노동자 계급, 이들이 주로 거주하며 상대적으로 경제가 낙후된 잉글랜드 북부와 스코틀랜드 등에서는 아직까지도 대처라면 이를 가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공과(功過) 없는 정치인이 존재하지 않으며 대처 또한 집권 당시 식민지 상실, 오일쇼크 등으로 인한 빚투성이 정부를 물려받은 상황에서 경제를 살려놨다는 점에서 ‘과’보다 ‘공’이 큰 정치인이 분명하다. 대영제국의 후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국제사회에서 저물어만 가던 영국의 위상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대처의 업적이다.

타계 9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그가 끊임없이 회자된다는 점이야말로 정치인 대처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실감케 한다. 트러스 장관과 수낵 전 장관 중 누가 승리할지는 알 수 없으나 두 사람이 대처 마케팅에 열을 올리는 것 못지않게 집권 후에도 대처 같은 지도력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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