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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기자칼럼] ‘집념’ 없인 ‘졌잘싸’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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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졌잘싸’라는 말이 있다. “졌지만 잘 싸웠다”의 줄임말이다. 스포츠 경기에서 패했으나 좋은 내용과 훌륭한 매너를 보인 선수, 팀을 격려할 때 쓰인다. 지난해 도쿄 올림픽에서 자신을 이긴 중국 선수에 ‘엄지척’한 이대훈(태권도), 전력 열세에도 4강까지 오른 여자배구, 세계랭킹 3위 스페인에 4점차로 석패한 여자농구, 메달은 따지 못했지만 좋은 기록과 뛰어난 플레이를 보인 황선우(수영)·우상혁(육상)·신유빈(탁구). 그들을 우리는 “졌잘싸”라는 말로 위로하고 격려했다.

경향신문

김세훈 스포츠부 부장


‘졌잘싸’를 들을 수 있는 조건은 크게 두 가지다. 꺾지는 못해도 당당히 상대할 만한 ‘뛰어난 경기력’이 첫 번째다. 두 번째는 최선을 다한 ‘철저한 준비 상태’다. 경기력은 결과, 준비는 과정이다. 경기력이 아무리 좋아도 나보다 강한 상대는 있게 마련이다. 그래도 그를 이기기 위해, 오랫동안 철저하게 준비했고 실전에서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맞선 선수만이 패해도 “괜찮다, 잘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스포츠에서 경쟁은 최고 가치 중 하나다. 규칙을 지키고 상대를 존중하면서 경쟁을 벌여 승패와 순위를 가리고 기록을 내는 게 스포츠 핵심 가치다. 아마추어 동호인들도 결코 참가에만 의미를 두지 않는다. 운동이 직업인 전문 선수에게 순위와 기록의 가치가 더욱 중요한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스포츠는 즐겨야 한다는 말을 종종 쓴다. 즐긴다는 것은 대충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즐긴다는 것은 어떤 것에 매료돼 연구하고 노력하면서 높은 경지에 오르고 이후에도 뭔가를 더 이루기 위해 자발적으로, 지속적으로 노력함을 의미한다. 한자 樂은 음악 악, 좋아할 요, 즐길 락 등 세 가지 뜻을 가진다. 樂은 나무 목(木), 검을 현(玄), 흰 백(白)자로 이뤄진 현악기 형태 글자다. 이강재 서울대 중문과 교수는 “악, 요, 락은 모두 악기와 관련됐다”며 “즐긴다는 것은 음악을 연주하면 흥이 나고 무아지경, 몰입 상태에서 연주하면 즐기는 경지에 이른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즉 즐거움은 뭔가를 정말 잘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최고 경지다. ‘졌잘싸’도 최선을 다해 준비했고 포기를 모르는 선수와 팀만 들을 수 있는 최고 칭찬 중 하나다.

요즘 거의 모든 종목 지도자들은 선수들이 근성, 위닝 스피릿을 잃었다고 걱정한다. 조금 강해진 훈련, 빡빡해진 일정을 꺼리는 선수들이 늘고 있다. 기본 운동만, 그것도 마지못해 하려는 안일함도 느껴진다. 잇단 패배에도 아무렇지 않게 웃는 경우도 적잖다. 팀이 져도 자기만 잘하면 된다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심지어 참가에 의미가 있다며 패한 아픔조차 거의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선수도 있다.

이런 선수 아닌 선수들에게 말한다. 이기려 하지 않는다면, 기록을 내려고 하지 않는다면 유니폼을 당장 벗어라. 패한 뒤 겸연쩍은 웃음과 그럴듯한 무표정으로 허술한 준비, 나약한 정신력, 잃은 근성을 감추려 하지 말라. 최선을 다한 선수만이 패해도 웃을 수 있고 그런 선수만이 자신을 이긴 승자를 축하할 수 있다. 종목과 상대를 존중하면서 자신이 선수로서 존중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매 순간 자신에게 부끄러움과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이런 선수만이 “졌잘싸”라는 위로와 격려를 받을 자격이 있다.

김세훈 스포츠부 부장 sh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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