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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7 (수)

[자작나무 숲] 유명해지는 것은 아름답지 않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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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목표 ‘K 문학 전략’ 부끄러워… 문학은 프로모션 대상 아냐

위대한 문학은 제도·권력·유행의 경계 밖에서 ‘눈물 닦아주는 손’

러 시인 “별것도 아니면서 모두 입에 오르내리는 건 창피한 일”

조선일보

그림=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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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꿈, 노벨 문학상 새 수상자가 10월 초면 발표된다. 어릴 적 국어 선생님은 서정주, 황순원 선생을 후보자로 꼽으셨다. 1970년대에는 김지하 시인이 유력하게, 그것도 일본에서 추천받은 것으로 안다. 이후 몇몇 문인이 단골로 거론되었고, 근래에는 비교적 젊은 작가들이 ‘K 문학’ 붐을 타고 근접해가는 듯하다.

그런데 ‘K 문학’(실은 거의 모든 ‘K 어쩌구’)이란 말이 내게는 못마땅하다. 나는 문학은 상품이 아니며, 따라서 브랜드 개념 역시 적합지 않다는 입장의, 어쩌면 시대착오적인 올드 패션이다. 문학은 ‘위대한 순간과의 만남’이라고 했던 비평가 해럴드 블룸의 고전적 정의에 여전히 환호하며, 책 속에 들어온 모든 사람은 ‘말나라 시민’이 된다고 했던 최인훈 소설가의 혜안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위대한 문학은 생래적으로, 제도나 권력이나 유행의 경계 밖을 향한다고 믿는다. 위대한 문학은 국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부 관련 기관이 ‘K 문학 글로벌 진흥(Global promotion of K-books)’ 프로젝트를 내세워 확성기 틀고, ‘중국과 일본이 노벨상을 받았으니, 이제는 한국 차례다’ 식의 기관장 인터뷰가 영어 신문에 실릴 때면, 솔직히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그것은 문학 앞의 부끄러움이고, 오직 쓰기 위해 태어난 듯 지금도 열심히 손과 머리와 마음의 펜을 움직이고 있을 훌륭한 한국 작가들 앞의 송구함이다. 문학은 프로모션(’세일’이란 말처럼 들린다) 대상이 아니다. 문학상이 극성스러운 번역 출판과 홍보로써 선취할 영예도 아니다. 노벨 문학상을 타기 위해 선택과 집중으로 번역 출판을 지원하자, 번역가를 양성하자, 세계에 한국어를 가르치자, 홍보국을 스웨덴에 세우자 등의 저돌적 전략론을 접할 때마다, 정작 한국이 마침내 받게 될 상의 참값어치는 떨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도 싶다.

그런 불편함이 혼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수년 전 미국 주간지 ‘뉴요커’에 실린 기사(‘거대한 정부 지원이 한국에 노벨상을 안겨줄까’)에서 어떤 한국 문학 에이전트가 이렇게 논평했다. “정작 책은 안 읽으면서 노벨상만 바라는 것이 아쉽다.” 한 번역가는 “아무개가 상을 타는 순간, 한국 문학 번역원이 승리 선언과 함께 문을 닫아버리지 않을까” 걱정했다. 심지어 “한국이 노벨 문학상 받는 날이 언젠가 올 테지만, 그런 일이 너무 빨리 일어나지는 않기 바란다”고 응답한 한국학과 교수도 있다.

러시아 문학은 수상자를 총 5명(러시아어로 쓴 벨라루스의 알렉시예비치까지 포함하면 6명) 배출했다. 관변 작가였던 숄로호프를 제외하곤, 그중 누구도 정부 후원을 받지 못했다. 후원은커녕, 탄압과 비판만 받았다. 파스테르나크가 노벨상을 스스로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친(親)서구 배신자, 반혁명주의자라는 소련 당국의 거친 여론 몰이 때문이었다. ‘우리에 갇힌 야수처럼 나는 끝났다./… / 나를 좇는 건 사냥꾼의 아우성뿐./ …/ 목은 올가미에 매달린 채/ 그래도 나는 내 오른손으로/ 이 눈물을 닦아내고 싶다’고 시 ‘노벨상’에서 그는 썼다. 여기서 ‘오른손으로 눈물을 닦아내고 싶다’는 표현은 곧 쓰고 싶다는 말이다. 작가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문학은 확실히 절망과 결핍의 막다른 길에서 더 힘차게 뿜어져 오르는 경향이 있다. 바로 문학이 눈물을 닦아주는 손이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아주 가끔씩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들’ 과목을 개설한다. 세계 여러 수상 작가의 작품을 읽고, 감상문 쓰고, 토론하는 교양 수업이다. 어느 날 한 학생이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은 건 영광이었다’는 수업평을 남겼다. 학생의 그런 평을 읽는다는 건 선생인 나의 영광이기도 하다. 마지막 수업 시간에 학생들은 돌아가며 자신이 선택한 한국 작가를 노벨상 후보로 추천하게 되어 있고, 이때 몇몇 작가가 고정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그들의 추천사가 그다지 화려하거나 강력한 것 같지는 않다. 한국 문학을 잘 몰라서 그럴 수 있고, 또 한국 문학에서 향유해온 재미나 감동이 수업에서 잠시 엿본 세계의 그것과 다른 성격이어서 그럴 수 있다. 어쩌면 ‘이제는 우리 차례’라는 그 무작정의, 대단히 반문학적인 당위성을 걷어냈을 때, 막상 보게 되는 것의 실체가 아직은 모호해서 그럴 수도 있다. 지금 그 실체는 열심히 만들어지는 중이다. 그러니 스스로 당당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좀 기다려봄 직도 하다.

노벨상 선정 2년 전인 1956년, 파스테르나크가 시에서 이렇게 썼다. ‘유명해지는 것은 아름답지 않은 일./ 우리를 드높이는 건 명성이 아니다./ 문서를 보관할 필요도/ 원고를 아낄 필요도 없다./ 창조의 목적은 자기를 바치는 일,/ 소란이나 성공이 아니다./ 별것도 아니면서/ 모두 입에 오르내리는 건 창피한 일이다.’

[김진영 연세대 교수·노어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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