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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이슈 미술의 세계

배달 플랫폼 시대…파편화된 개인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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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배달 플랫폼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의 초상을 담은 김아영 작가의 미디어아트 `다시 돌아온 저녁 피크 타임`. [사진 제공 = 갤러리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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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슈트를 입은 여인이 오토바이를 타고 도시를 질주한다. 화려한 조명이 빛나는 도시는 가상의 서울. 에른스트 모(Ernst Mo)는 막강한 영향력의 배달 플랫폼인 딜리버리 댄서 소속 라이더다. 라이더는 일반 댄서, 파워 댄서, 마스터 댄서, 신의 댄서 순으로 계급화되고, 최상의 능력자는 고스트 댄서로 분류된다. 디바이스에는 5만4108명의 댄서가 운행 중임이 표시된다. 인공지능은 목숨을 걸고 악천후의 도시를 달리도록 무한 경쟁을 설계했다.

모는 어느 날 자신의 도플갱어와 같은 고스트 댄서 '엔 스톰(En Storm)'을 우연히 만나 이 비밀을 듣게 되고, '매트릭스' 속 네오처럼 정체성의 혼란을 느낀다. 배달에 집중하지 못하자 별점이 낮아지고, 알고리즘의 할당에서 배척당하며 결국 둘은 파국에 이르고 만다. 24분의 미디어아트 '딜리버리 댄서의 구'는 배달 플랫폼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의 초상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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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현대에서 김아영(43)의 개인전 '문법과 마법(Syntax and Sorcery)'이 개막했다. 영상과 월페이퍼 설치, 조각 등 총 11점의 신작을 걸었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프리즈 위크'에 젊은 작가를 간판으로 내세워 회화 전시만 가득한 삼청동 일대에서 실험적인 전시를 선보인다. 김아영은 한국 근현대사, 지정학, 이송, 초국적 이동 등의 역사적 사실과 동시대의 첨예한 이슈를 방대한 리서치를 통해 재구성하며 베니스비엔날레, 광주비엔날레 등에 초대되며 국내외 미술계에서 주목받은 작가다.

배달 플랫폼을 주제로 삼게 된 계기는 코로나19였다. 9일 만난 작가는 "배달 노동이 한국에선 흔했는데 전염병을 계기로 전 세계에 보편적인 노동이 됐다. 봉쇄된 도시를 누비는 건 라이더뿐이더라. 테크노 시대의 불안정성에 관심이 있는데 기술이 발전할수록 누락되는 인간의 존재를 다뤄보고 싶었다. 앱이나 가상현실과 연동된 신체경험은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신체적·정신적 경험이다"고 설명했다.

전시 구상을 위해 직접 배달 체험도 했다. 망원동에서 여성 라이더와 함께 배달을 했는데 한강 둔치까지 30분이 걸려 크로플을 배달했더니 3500원이 손에 떨어졌다. 작가는 "사람 대신 인공지능이 배차를 하면서 인물 간의 소통이 사라지고 비정해졌다"면서도 "팬데믹으로 2년간 체류하면서 서울에 특히 애착을 갖고 작업했다. 용산, 을지로, 남산타워 등 특정한 지명도 많이 나온다. 서울을 다양한 층위의 위상학적 미로로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서사의 구현을 다양한 전문가와 협업했다. 김지순 디자이너가 의상을 제작했고, 2층을 채운 가로 20m의 거대한 벽화 '다시 돌아온 저녁 피크 타임'은 웹툰 작가 1172작가와 작업했다. 질주하는 영상은 메타버스에 쓰이는 게임엔진을 사용했고, 자율주행센서 라이다(LiDAR)로 도시를 스캔해 배경을 구현했다. 파국이자 구원을 상징하는 두 존재가 얽히는 서사는 양자역학에서 모티브를 따왔고, 물리학자와 위상수학자의 조언도 받았다.

두 여인의 세계관은 전시장 전체에 구현됐다. 지하 1층의 영상을 보고 1층으로 올라가면 '고스트 댄서 A'가 기다린다. 처형당한 듯한 목이 잘린 두 헬멧이 서로를 노려본다. 영화 '공각기동대'처럼 구불구불한 전선이 내장처럼 흘러나온다. 2층에 설치된 3점의 조각 '궤도 댄스'는 두 라이더가 미로 속을 달리는 걸 형상화했다. 용접하지 않았음에도 고정되어 있고, 무한하게 분기하는 구의 형상은 프랙털 구조다. 작가는 "지독하게 얽혀있는 구들은 영상 속 두 인물을 상징한다"고 했다.

소수자인 여성 라이더를 통해 전복의 서사를 만들어낸 작가는 전시 곳곳에 다층적이고, 이중적인 의미를 숨겨놓았다. 작가는 "그동안 아시아가 예술에서 다뤄지는 방식은 위험한 곳이거나 페티시적 묘사뿐이었다. 서울을 배경으로 아시아 퓨처리즘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9월 14일까지.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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