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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 (화)

젊은 나이에 순국한 17인 광복군 선열을 꼭 기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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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윤 기자(filmmsy@naver.com)]
광복절은 1945년 1945년 8월15일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통치로 부터 독립된 것을 기념하고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경축하는 날이다. 

광복절은 1949년 10월1일 제정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여 국경일로 제정되었다. 

매년 8월15일 광복절을 맞아 뜻깊은 행사가 있었지만 올해는 특히 뜻깊은 행사가 있었다. 

국가보훈처는 서울 수유리 광복군 합동묘소에 안장되어 있는 한국광복군 선열 17위를 광복 77년 만에 국립묘지인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하는 절차가 8월11일부터 14일까지 진행되었다고 밝혔다. 

광복군 선열 17위 합동 이장은 후손 없는 광복군 선열들을 국민과 함께 기리고 국가가 끝까지 책임지기 위해 직접 추진한 첫번째 사례라는 것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번 합동 이장을 하는 광복군 선열17위는 대부분 젊은 나이에 순국하여 후손이 없어 지난 77년간 국립묘지로 이장이 어려웠다. 때문에 이분들의 성명과 공적을 우리 국민들이 관심을 갖고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선열 17위의 성명과 공적 사항은 다음과 같다. 

김유신(金有信) 선생은 서울 사람으로 북경(北京)에서 출생하였고 1935년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를 졸업하였다. 동교 졸업 후 1936년 3월에는 남경(南京)에 설치된 "학생특별구"에서 활동하다가 1938년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가입하였다. 동청년공작대는 1941년 1월 광복군 제5지대에 편입되었으며, 1942년 4월 다시 광복군 제2지대에 소속되어 제1구대 대부(隊附)로 낙양지역에서 공작하였다. 중국어에 능통하여 낙양부근 도구(渡口)우체국의 직원으로 가장 잠입하여 긴밀한 연락 및 초모공작을 폈다. 1943년 2월 산서성 태항산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찬원(金贊元) 선생은 평북 정주(定州) 사람으로 1941년 광복군 제5지대에 입대하여 중국 중앙전시군사간부 훈련단 한청반(韓靑班)을 수료하였다. 1941년 1월 1일 제5지대가 해체되면서 제2지대로 편입되자 제2구대 대부(隊附)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45년에 중국 태원(太原) 지구에서 지하공작 중 일본군에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백정현(白正鉉) 선생은 서안(西安)에 있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입대하였으며, 1940년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광복군 창설과 함께 제5지대로 편입됨에 따라 광복군 제5지대에 편입되었다. 그후 광복군 제2지대로 편입되어 초모 공작활동과 적 정보수집, 적 시설파괴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10월 제2지대 제3구대 대부(隊附)로서 개봉(開封)의 석가장(石家莊)에서 정보수집 활동 중 일 헌병에게 체포되어 북경(北京)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탈옥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총살 순국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이해순(李海淳) 선생은 평남 강서(江西) 사람으로 서안(西安)에서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하였다. 산서성 운성(運城)에 파견되어 공작활동을 전개하던 중, 체포되어 적의 악랄한 고문과 재판에도 끝까지 기개를 굽히지 않고 항쟁하다가 순절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현이평(玄以平) 선생은 국민부(國民府)에서 활동하던 현익철(玄益哲)의 조카로 1939년 중국 서안(西安)에서 나월환(羅月煥) 등과 함께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창설하고 선전·초모(招募) 등 지하공작을 벌여 일본군 내부의 한국 청년을 빼내어 공작대원으로 편입시키는 한편, 중국군과 합동으로 일본군의 후방 교란 및 일본군 막사 습격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40년 5월 동 공작대가 서안 성내 남원문(南院門) 가설극장(假設劇場)에서 '군민(軍民) 위안과 일선장병 위문품 모집을 위한 공연대회'를 개최하자, 대회 규찰장(糾察長)으로 임명되어 국경의 밤,한국의 일용사(一勇士), 아리랑 등을 10여 일 동안 공연하여 중국 군관민들에게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활동하다가 1941년 3월경 피살 순국하였다.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순근(金順根) 선생은 평북 선천(宣川) 사람으로 광복군 제3지대 화북(華北)지구 특파원 김광언(金光彦)과 접선되어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입대 후 김광언 등과 함께 북경(北京) 지역에서 초모공작을 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동방석(董邦石) 선생은 함북 청진(淸津) 사람으로 섬서성 서안(陝西省 西安)에서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하여 광복군 특별간부훈련반을 수료하였으며 같은 해에 한미합작특수훈련인 OSS훈련에 가담하였다. 그는 제2지대 제3지구 강원도반에 편성되어 국내 진공을 기다리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이도순(李道淳) 선생은 평북 의주(義州) 사람으로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입대하였다. 1940년 9월에 광복군이 편성됨에 따라 제5지대에 편입되었으며 중국 전시군사간부훈련 제4단 한광반(韓光班)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 1941년 12월에는 산서지구(山西地區)에서 적후방 공작요원으로 활동하다가 부대원간의 내분이 일어나 대장 나월환(羅月煥)을 암살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15년 역형(役刑)에 처해졌다가 후에 사면되어 광복군 제2지대로 편입되어 항일활동을 전개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이한기(李漢基) 선생은 평안북도 사람으로 개봉(開封)에서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여 전방공작원으로 활동하다가 OSS훈련대원에 선발되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조대균(趙大均) 선생은 평안북도 사람으로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여 한미합작특수훈련인 OSS훈련 대원으로 선발되어 훈련을 받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성률(金聲律) 선생은 황해도 연백(延白) 사람으로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하여 적후방에서 공작 중 전사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운백(金雲白) 선생은 평북 의주(義州) 사람으로 광복군 제5지대에 입대하여 한청반(韓靑班)을 수료하였다. 1942년 3월 제5지대가 해체되면서 제2지대 제3구대 제1분대원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중국 제24집단군에 편입되었던 선생은 1943년 9월 태항산(太行山)전투에서 전사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문학준(文學俊) 선생은 평남 평양(平壤) 사람으로 서안(西安)에서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였으며 제2지대에 편입되어 초모공작활동·적 정보 수집 등의 활약을 하였다. 1943년 3월 중국군 제27집단군에 파견되어 작전 중 하남성(河南省) 수무현(修武縣)에서 전사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안일용(安一勇) 선생은 평북 선천(宣川) 사람으로 서안(西安)에서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하였다. 그후 하남성(河南省) 수무현(修武縣)에서 공작활동을 전개하던 중 순국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전일묵(田一默) 선생은 평북 용천(龍川) 사람으로 산서성(山西省), 하남성(河南省) 등지에서 초모 공작활동을 전개하던 지하공작원 김천성(金天成)과 연결되어 서안(西安)에 있는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하였다. 그후 김천성(金天成)·김찬원(金贊元) 등과 함께 산서성(山西省), 하북성(河北省) 일대로 나가서 위험을 무릅쓰고 작전활동을 폈다. 이들은 한·중·일 3개 국문으로 된 인쇄물을 통하여 후방 한·중 양국 민중들의 항일 의식을 높이고 지하조직을 통하여 비밀정보를 얻어 우군에게 제공하는 등의 활동을 폈다. 1945년 8월에 초모 공작활동 및 중국유격대와 합류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중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순국하였다.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정상섭(鄭相燮) 선생은 평남 강서(江西) 사람으로 광복군 제5지대에 입대하여 중국 중앙전시간부훈련 제4단 특과총대학원대 한청반(中央戰時幹部訓練 第四團 特科總大學員隊韓靑班)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후 제2지대에 편입되었으며, 중국 제24집단군에 파견되어 유격전에 참가하던 중, 태항산(太行山)전투에서 전사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한휘 선생은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하여 중북하북성, 하남성 등지에서 정보수집 및 초모공작 활동 등을 전재하였다. 올해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 예정이다. 

이번 광복군 선열 17위 이장은 8월11일 수유리 합동묘소에서 개장 및 수습을 하고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임시안치 하였으며 8월12일부터 8월13일까지 국립서울현충원에서 국민추모·참배기간을 가졌다. 8월14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합동 봉송식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합동 안장식을 진행했다. 

프레시안

▲ 한국광복군 선열 17위를 광복 77년 만에 국립묘지인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하는 절차가 8월11일부터 14일까지 진행되었다. 사진은 국립대전현충원의 현충탑이다. ⓒ프레시안(문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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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윤 기자(filmms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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