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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폭우가 휩쓴 자리…“엄두가 안 나, 손도 못 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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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의 ‘마지막 판자촌’이라고 불리는 구룡마을. 지난 8일 폭우가 쏟아진 뒤 엿새가 흐른 14일 오전 이 마을에 들어서자 높이 쌓아둔 쓰레기 더미가 보였다. 빽빽이 모여 있는 판잣집들은 세차게 내린 비에 맥 없이 주저앉았거나 집을 지탱하던 골조는 앙상한 뼈를 드러낸 모습이었다.

기록적인 폭우 이후 일주일이 다 되어가지만 이곳에 사는 주민들은 아직도 큰 고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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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적인 호우로 인해 수해 피해를 입은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주민들이 14일 복구작업을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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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건 솥단지와 탁자뿐…특별재난지역 선포는 ‘감감무소식’”


개천을 따라 구룡마을 안쪽 주택가로 들어서니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판잣집들이 이어졌다. 김모씨(65)는 흙을 쌓아둔 포대와 쓰레기가 뒤엉켜 있는 자신의 집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야간에 목욕탕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는 지난 9일 아침에야 일을 마치고 집에 도착했다. 흙탕물을 뒤집어 쓴 벽지가 당시 집에 들어찬 빗물의 수위를 짐작케 했다. 김씨는 “행거에 걸어둔 옷가지만 건져내고 모두 잃었다”고 했다. 쓸 만한 것이라곤 솥단지 2개와 탁자밖에 남지 않았다.

김씨는 비가 계속될 것이란 일기예보를 언급하며 “인접해 있는 빈집들에 물이 차 또 빗물이 (집으로) 들어찰까봐 걱정”이라고 했다. 그는 13일까지는 구청이 운영하는 이재민 임시 주거시설에 머물렀지만, 지금은 구룡마을 사무실 한 켠에서 생활하고 있다. 딸의 집에서 몸을 씻고 간단한 식사를 준비해온다고 했다.

김씨는 “여야 국회의원들 다 한 입으로 특별재난지역을 선포한다더니 아직 조치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이날 구룡마을에서는 강남구청 직원들이 재난신고서를 제출한 집들을 찾아 피해 현황을 조사하고 있었다. 김씨가 “우리 집은 아직 조사 안 했다”며 발을 동동 구르자, 직원은 “신고하셨으면 곧 올 것”이라며 발길을 옮겼다.

구룡마을 개천에 인접한 정모씨(79)의 집도 큰 타격을 입었다. 8일 잠을 청하려던 정씨와 아내는 가슴팍까지 물이 들어차자 밤 11시쯤 집을 탈출했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잠옷 차림으로 가까스로 대피했다. “가구가 (출입구를) 막았는데 아주 구사일생으로 도망나왔습니다.” 정씨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비스듬히 기울어진 상태인 그의 집에는 장롱, 냉장고, 가재도구 등이 산처럼 쌓여있어 발을 들일 수조차 없었다. 전날 이재민 임시거주시설에서 퇴소한 그는 현재 구청의 지원을 받아 인근 숙박시설에 머물고 있다. 기약 없는 복구 작업에 정씨는 “언제까지고 오래도록 지원받을 수 있겠나”하며 불안해했다.

정씨는 “엄두가 안 나 손을 못 대고 있다”며 “구청에서 지원해준다고 하는데, 지금 뭐 마땅치가 않다. 정부가 보상을 제대로 해줄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SH공사는 자꾸 나가라고 하는데, (주거권이) 보장되지 않는데, 나가라고만 하면 말이 되나”라고 되물었다. 정씨 옆에 있던 주민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라며 “강남구청에서 사방사업을 하나도 안 해서 피해가 커졌다”고 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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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적인 호우로 인해 수해 피해를 입은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의 한 주민이 14일 무너진 집을 바라보고 있다. 권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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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재해에 경제적 피해까지…가중되는 부담


수해 피해를 크게 입은 서울 관악구 등 다른 지역 주민들도 집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상황에 경제적 부담을 호소했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 반지하 주택에 사는 김모씨(51)는 8일 밤부터 집을 탈출했다. 김씨와 남편, 딸 등 세 식구는 집을 나온 첫날 밤은 건물 윗층 ‘주인 집’에서 보냈지만, 다음날부터는 인근의 모텔에서 묵었다. 동 주민센터에 이재민 임시 생활 공간을 마련했지만, 매트릭스 하나에 담요 한 장뿐인 사정을 보고는 모텔을 택했다. ‘3박4일’ 숙박료로 20만원 넘게 들었는데, 한 달 수입 170만원으로 홀로 생계를 책임지는 김씨에게는 ‘거금’이다.

김씨는 더는 바깥 생활을 지속할 수 없어 전날 집에 돌아와 급한 대로 물기가 있는 바닥과 젖은 물건들을 드라이기로 말렸다. 그는 “냄새가 심한 상황”이라면서도 “집에서 잠을 청해보려 한다”고 했다.

이재민이 받을 수 있는 지원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김씨는 “재난 피해 신고서를 주민센터에 냈는데, 직원이 ‘(피해를) 다 쓴다고 그에 대해 배상이 있는 게 아니고, 50이면 50, 100이면 100 위로금조로 지급될 예정’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이날 오전 11시 기준 거주지를 떠나 대피한 사람은 수도권과 강원, 충청, 전북 등 7개 시·도 55개 시·군·구에서 7480명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이재민은 1107세대·1901명이며, 대부분 서울과 경기에 집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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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적인 호우로 인해 수해 피해를 입은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의 주택들이 14일 무너져 있다. 권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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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신림동 반지하 주택에서 발달장애인 언니를 돌보던 일가족의 사망 등 이번 폭우로 드러난 ‘재난의 불평등’이 피해 복구 과정에서도 경제적 부담 등 여러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자연재해가 사회적 재난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약화시킬 수 있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역할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다.

반지하 침수 현장에서 만난 한 주민은 “직장과 아이 학교가 서울인데, 여기서 지내지 못하면 서울에서는 살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면서 “정부가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 말도 좀 들어보면서 의견을 수렴했으면 한다”고 했다.

답답한 마음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도움을 요청한 이재민과 그를 돕기 위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금 운동도 눈길을 끌고 있다.

신대방동 반지하 주택에서 사는 차종관씨(27)는 지난 1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집이 침수돼 모든 살림살이를 잃은 채 길바닥에 내몰렸다. 재산 피해액을 추산해보니 700만원대에 이른다”며 “아직 정부의 지원 계획은 없다. 지원이 나온다 해도 극히 적은 규모일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며 후원을 요청했다. 전날 기준 119명으로부터 960만원이 답지했다. 차씨는 개인 피해 복구에 필요한 700만원 이외의 200만원은 수해 피해를 복구하는 데에 기부했다고 밝혔다.

차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서울시가) 반지하를 무조건 없애야 한다는 관점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수해 방지 시스템을 갖추고 재난 피해를 입은 거주민들에게 지원 관련 정보를 제때 제공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했다.

박하얀 기자 whit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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