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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좌회전 길 없는데 좌회전 표시, 그래서 식물인간 됐다면 누구 책임 [그법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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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법알 사건번호 72] 좌회전 길 없는데 '좌회전 신호시 유턴' 도로표지 사고 책임은



지난 2017년 3월쯤 친구들과 제주도로 여행을 떠난 A(당시 24세)씨. 같은 달 29일 오토바이를 빌려 달리던 이들은 ‘┣’ 형태의 교차로에서 유턴을 하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중앙일보

지난 2018년 제주도에 근접한 제19호 태풍 '솔릭'이 몰고 온 비바람에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항 인근 도로에 오토바이가 쓰러져 있다.뉴시스 ※기사와 관계없는 자료 사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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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가 유턴하던 곳에는 신호등과 함께 유턴 지시 표지가 설치돼 있었는데, 유턴 지시 표지에는 ‘좌회전시, 보행신호시/소형 승용, 이륜에 한함’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문제는 정작 신호등에는 좌회전 신호가 없어 표지와 신호등의 신호 체계가 맞지 않았습니다. 또 이 신호등을 바라보고 운전할 때 왼쪽으로는 좌회전할 길이 아예 없는 등 표지가 도로 구조와도 맞지 않았죠.

또 다른 문제도 있습니다. A씨 등은 빨간불이 들어왔을 때 불법 유턴 했는데요. 때마침 시속 71km로 운전하던 SUV차량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자동차는 불법 유턴하던 A씨 오토바이의 뒷부분과 부딪혔습니다.

A씨는 이 사고로 ‘외상성 경막하 출혈’을 입었습니다. 이후 ‘식물인간’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호흡을 제외한 음식물 섭취와 탈의, 대소변, 목욕 등 일상생활 전반에 타인의 도움의 필요하게 된 겁니다.

A씨의 부모님은 제주도를 상대로 ‘좌회전하는 길이 없는데도 좌회전하면 유턴이 가능하다는 내용의 보조표지 때문에 불법 유턴하게 돼 사고가 났다’며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죠. 돌봄비(개호비)와 A씨의 기대 수입 등을 고려해 A씨에게 12억7700만원, 부모들에게 2000만원을 지급하라는 내용입니다.

한편 SUV 운전자는 교통사고처리특례법위반(치상)죄로 재판에 넘겨졌지만, ‘앞을 제대로 잘 봤다고 하더라도(전방 주시 의무) 사고를 예측하거나 회피할 수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여기서 질문



좌회전할 길이 없는데도 실제 도로현황과 다르게 좌회전 표시를 해 놓은 도로 표지판. 제주도의 설치·관리상 하자일까요?



법원 판단은



1심은 ‘도로표지의 하자에 해당하지 않고 설사 하자라 보더라도 교통사고와 인과관계도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표지판 중 ‘좌회전시 유턴’ 부분이 도로 및 신호등 현황과 맞지 않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A가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려서 위 표지판에 따라 ‘보행신호시’에 유턴을 함으로써 충분히 사고를 방지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2심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A씨에게 2억3524만원과 부모들에게는 1000만원 등을 지급하라고 했죠. 실제 도로상황에 맞지 않는 잘못된 신호표지로 인해 운전자가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고 이는 영조물 설치 관리상 하자에 해당하고, 사고와의 인과관계도 인정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중앙일보

법원.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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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심의 엇갈린 판단에 대법원까지 온 이 사건. 대법원 2부(주심 이동원 대법관)는 원심 판단에 이상이 있다고 보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보조표지 내용에 일부 흠이 있더라도 일반적·평균적 운전자 입장에서 상식적이고 질서 있는 이용 방법을 기대할 수 있다면 표지의 설치나 관리에 하자가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이유입니다.

보조표지에 ‘좌회전시, 보행신호시’라고 적혀있으므로 신호등이 좌회전이거나 보행자 신호등이 녹색일 때 유턴이 가능하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당시 교차로는 좌회전할 도로가 설치돼 있지 않았고 신호등에 좌회전 신호도 없었기 때문에 보행자 신호등이 녹색일 때 유턴할 수 있을 뿐이라고 이해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보행자 신호가 녹색일 때 유턴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빨간색일 때도 유턴할 수 있다고 혼동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대법원 관계자는 “없는 길을 있는 길이라고 전제한 신호표지가 있다는 것만으로 이를 신호표지 하자라고 볼 수 없고, 좌회전 길이 없음이 명백한 상황이므로 혼동의 우려가 있다고 볼 수도 없다는 취지”라고 설명했습니다.

■ 그법알

‘그 법’을 콕 집어 알려드립니다. 어려워서 다가가기 힘든 법률 세상을 우리 생활 주변의 사건 이야기로 알기 쉽게 풀어드립니다. 함께 고민해 볼만한 법적 쟁점과 사회 변화로 달라지는 새로운 법률 해석도 발 빠르게 전달하겠습니다.

김수민 기자 kim.sumin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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