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증인이다"…日위안부 문제 증언하며 세상에 알려
국제사회도 관심 가지면서 위안부 문제 해결 실마리
김학순 할머니가 지난 1995년 일본 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사진= AF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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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할머니는 1991년 12월에는 일본으로도 건너가 자신의 피해를 증언했다. “일본 정부에서 (위안부가) 없다고만 하지 마라. 엄연히 (내가) 살아 있다.” 이 기자회견은 일본 사회에 자기반성의 목소리를 촉발시킨 계기가 됐다. 회견장에서 일본인 남성 기자가 김 할머니에게 무릎을 꿇으며 사죄했다는 증언도 있다.
김 할머니의 증언에 이어 미국에서 `일본군이 공식적으로 위안부 문제에 관여`했음을 증명할 문서가 드러났다. 군부와의 연관성을 부인하던 일본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1992년 1월 29일, 미야자와 기이치 당시 일 총리는 “우리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사람들에게 마음 속 깊은 사과와 반성을 한다”고 사죄했다.
자신을 증인으로 내세워 위안부 피해를 세상에 처음으로 알린 고귀한 희생의 날은 2012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세계 위안부 기림일`로 지정됐다. 우리 정부도 2018년부터 국가기념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지정해 피해자들을 위무하고 있다.
김 할머니는 이후에도 이 문제를 공론화하면서 위안부 문제를 전세계인이 인지하고 반성할 수 있게끔 하는 데 여생을 바쳤다. 1991년 12월 김 할머니가 일본 정부에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도쿄지방법원에 청구하면서 국제사회는 이 문제에 주목했다.
김 할머니는 용감한 사람이었다. 김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공개 증언하고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면서 수많은 피해자가 용기를 냈다. 국내는 물론 중국과 필리핀, 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등 많은 피해 여성들이 김 할머니의 뒤를 이어 일본의 잔혹성을 고발했다.
김 할머니는 1997년 12월 8일 평생 모은 약 2000만원을 “나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고있는 사람을 위해 써달라”며 기부했다. 그리고 8일이 지난 1997년 12월 16일 세상에서의 고통을 뒤로 하고 영면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지난해 지면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의 부고기사를 발행했다.(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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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타임스는 김 할머니의 별세 24년이 지난 지난해 `위안부 침묵을 깼다`라는 부고기사를 실어 김 할머니를 기렸다. 알렉시스 더든 코넷티컷대 역사학 교수는 김 할머니를 “20세기의 가장 용감한 사람들 중 한 명”이라고 평가하면서 “유엔이 일본 정부에 전쟁 범죄와 반인륜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지금도 진행 중인 과정의 시작이었다”라고 했다.
김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평생을 바친 위안부 여성운동의 정신은 여전히 계승되고 있다. 가수 송가인은 김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 사실을 알린 30주년을 맞아 `시간이 머문 자리`라는 노래를 불러 헌정했다. 이 노래는 일본인 엔카 가수 아리아가 `기억`(記憶)이란 일본어 버전으로 다시 불렀다. 전쟁의 아픔을 다음 세대가 기억하고 반복하지 않는 것, 김 할머니가 바랐을 미래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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