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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 떠난 ‘생명 살릴 곡물’은 굶주림을 돕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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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구정은의 현실지구

부자나라 향한 우크라 곡물 수출선

러시아 봉쇄 풀린 우크라 항구

식량 실은 화물선 출발했지만

모두 판매용 실은 상업 선박들

빈국에 얼마나 갈지 알수없어


한겨레

9일 벌크선이 우크라이나 남부 초르노모르스크 항구를 떠나고 있다. 팻말에 ‘주의! 지뢰!’라고 쓰여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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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한 척이 튀르키예 남쪽에 멈춰 섰다.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 선적을 둔 ‘라조니’라는 화물선이다. 배에 실린 것은 옥수수, 힘겨운 국제협상 끝에 우크라이나에서 나온 곡물이 갈 곳을 찾지 못한 채 바다에 떠 있다. 러시아의 봉쇄로 우크라이나에 묶여 있던 곡물들이 이달 들어 항구를 떠나기 시작했다. 옥수수를 실은 배 두 척은 튀르키예로 향했다. 아일랜드, 영국, 이탈리아, 중국으로 향한 선박도 있다. 8월1일 첫 출항 이후 40만톤 가까운 곡물이 배에 실려나갔다.

식량, 왜 배고픈 이들에게 못 갈까


우크라이나 항구들이 러시아군에 봉쇄당한 지 다섯 달이 넘어가면서 식량 불안이 커졌다. 유엔은 이 봉쇄를 풀고 세계의 밥상 걱정을 덜기 위해 러시아와 협상을 했다. 튀르키예가 중재한 협정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초르노모르스크 등 3개 항구를 거점으로 곡물 수출을 보장하는 ‘회랑’이 만들어졌다.

협정의 성과로 일부나마 항구가 열렸지만 곡물이 곧장 배고픈 이들의 입으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끊어졌던 공급망이 다시 이어지면 시장에서의 가격이 떨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을 뿐이다. 스테판 뒤자리크 유엔 사무총장실 대변인은 “개도국들에 식량을 수출하는 것은 인도주의 프로그램이 아니라 상업 계약”이라고 말했다. ‘유엔은 왜 식량을 굶주린 이들에게 보내지 못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예방적 답변이다.

유엔도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곡물을 약속대로 빼낼 수 있도록 유엔은 웹사이트를 만들어 선박의 위치를 추적하고 적재량을 모니터링하기 시작했다. 세계식량계획(WFP)은 예멘과 소말리아처럼 식량 사정이 몹시 나쁜 곳들에 곡물을 보내려고 배 한 척을 세냈다. 하지만 흑해를 떠난 나머지 배들은 모두 판매를 위해 곡물을 운반하는 상업 선박들일 뿐이다. 식량 부족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것이라지만 지금까지 풀려난 물량의 대부분은 옥수수이고 콩과 해바라기기름이 일부 포함됐다. 우크라이나가 작년에 수확한 밀은 이미 2월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수출한 까닭도 있다. 하지만 동물 사료나 바이오연료인 에탄올 생산에 많이 쓰이는 옥수수가 맨 먼저 대량으로 풀린 것 자체가 ‘상업적’이다.

‘식량은 원조가 아니라 판매의 대상’이라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흑해를 떠나 지중해를 맴도는 라조니호다. 곡물을 싣고 우크라이나의 오데사 항구를 출발한 이 배는 레바논으로 갈 예정이었지만 하역을 거부당했다. 레바논 주재 우크라이나 대사관은 “선박의 화주 쪽에 따르면 레바논 내 구매자가 도착이 늦어진 점 등을 들며 화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지중해 동쪽에 있는 레바논은 식량을 수입에 의존한다. 인구 680만명, 면적 1만㎢의 작은 나라 레바논에서 지난해 생산한 밀은 14만톤인 데 비해 수입한 양은 75만톤이 넘는다. 그중 70%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로부터 왔다. 올해 들어 이 나라의 식료품 값은 120%가 넘게 올랐다. 수도 베이루트에서는 이태 전 항구에서 폭발이 일어나 200명 넘는 이들이 숨지고 곡물창고가 타버렸다. 그 일로 식량 공급이 가뜩이나 불안정하던 차였다. 베이루트아메리칸대학 전문가들에 따르면 통화 가치가 떨어지면서 지난해 레바논 가정들은 매달 최저임금의 5배에 이르는 식비를 썼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더해지자 빵집들은 배급제를 도입했고, 암시장에서는 웃돈 붙은 빵이 팔리고 있다. 라조니는 식량수출 협정 뒤 우크라이나 항구를 가장 먼저 출발한 배였다. 이 배에 실린 옥수수는 2만6000톤이 넘었다. 그러나 이제 이 배에 실린 곡물은 새로운 구매자를 기다리고 있다.

9월 중순까지 우크라이나에서 밖으로 나갈 곡물만 해도 300만톤에 이른다는데, 그중 얼마나 먹을 것이 모자라는 이들에게 전달될지는 불확실하다. 작년과 올해 우크라이나의 밀 수확량은 2000만톤으로 추산된다. 트럭이나 기차로 운송할 수 있는 양은 한 달에 200만톤에 불과하다. 반면 ‘회랑’에 속한 3개 항구는 한 달에 각기 300만톤을 내보낼 수 있다고 하니 이론적으로는 10월까지 ‘세계의 곡창’으로부터 곡물을 대부분 실어나를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위험한 해역에, 높은 보험료를 감내하며 배를 들여보내려는 선주들이 많지 않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앞다퉈 쏟아부은 기뢰는 이미 우크라이나 연해를 벗어나 루마니아, 불가리아, 튀르키예 쪽 해역까지 밀려갔다. 라조니호의 승무원들도 출항을 앞두고 언론 인터뷰에서 기뢰를 걱정했다. 전쟁이 시작됐을 때 우크라이나의 항구에 발이 묶인 선원이 2000여명에 이르렀지만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지금은 450명 정도만 남아 있다. 배를 띄우려 해도 용감하게 흑해를 건널 선원들을 찾는 것조차 힘들 거라고 외신들은 전한다. 이런 위험 속에서 선박 보험료를 낮추기 위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유엔과 튀르키예가 이스탄불에 ‘공동조정센터’를 만들어 보험사들과 협상을 하고 있다. 그러나 보험사들의 입장은 강경하다. 기뢰를 제거할 명확한 계획을 내놓고, 선박들을 보호할 국제 해군 호위대를 배치하라는 것이다. ‘전쟁 특수’를 노려 재빠르게 보험상품을 내놓은 회사들도 있기는 하다. 이렇게 먹거리는 거듭해서 상품이 되고, 식량 불안은 협상과 거래의 대상이 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전세계 밀 수출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침공 때문에, 러시아는 스스로 불러들인 제재 때문에 곡물을 내보내지 못하니 세계의 밥값이 올라간 것은 당연하다. 천연가스는 식량위기를 가중시킨 또 다른 요인이다. 러시아가 제재를 받으면서 천연가스 값도 올라갔고, 농업과 운송과 가공, 포장 등등 모든 과정에 인플레가 끼어들었다. 우크라이나는 전쟁통에 올해 농사를 예년만큼 짓지 못하고 있으니 식량 가격은 당분간 계속 오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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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나라 향한 곡물선 없어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등의 자료를 보면 미국인은 2018년 기준으로 매일 평균 3780칼로리를 섭취했다. 튀르키예도 비슷했다. 프랑스와 독일, 루마니아 사람들은 3500칼로리가량의 음식을 날마다 먹었다. 아프가니스탄과 예멘 사람들은 2000칼로리를 조금 웃돌았다. 동아프리카 섬나라 마다가스카르나 우간다, 짐바브웨인들은 2000칼로리어치도 못 먹었다. 에리트레아, 소말리아, 남수단 같은 몇몇 아프리카 나라들은 자료조차 없다.

유엔은 우크라이나에서 실려나가는 곡물들을 가리켜 ‘생명을 살릴 화물’이라 표현했다. 하지만 지금껏 흑해를 떠난 선박들 중에 에리트레아나 소말리아, 예멘으로 가는 배는 없다.



신문기자로 오래 일했고,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 <10년 후 세계사> 등의 책을 냈다. 국제 전문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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