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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분노하는 날이 아니라 미래를 다짐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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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김황식의 풍경이 있는 세상]

다시 광복절을 맞습니다. 3·1절, 제헌절, 개천절, 한글날과 함께 5대 국경일의 하나입니다. 일제의 질곡(桎梏)에서 해방되어 나라를 되찾은 기쁜 날이고 부끄러운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하여 이를 기념하며 기억해야 할 날입니다.

다른 한편 7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나라의 대표적인 국경일로 경축해야 할지, 의문도 듭니다. 일본과 관련된 국경일이 광복절 외에 3·1절도 있습니다. 5대 국경일 가운데 2개가 일본과 관련된 날입니다. 2012년까지는 5대 국경일 가운데 3·1절, 광복절, 개천절만이 공휴일이고 정작 제헌절과 한글날은 공휴일도 아니었습니다. 공휴일인 국경일의 3분의 2가 일본과 관련된 날이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진정으로 우리가 자랑스러워해야 할 날이 한글날이라는 국민의 뜻을 모아 2013년부터 한글날도 공휴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모든 면에서 일본과 어깨를 겨룰 당당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존심이 조금 상합니다. 외국 지인과 광복절이 국경일이고 공휴일이라는 얘기를 할 때면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재외 공관에서는 경축 행사일을 광복절에서 개천절로 바꾸었습니다.

조선일보

일러스트= 김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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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한일 양국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강제 징용공 판결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그 바탕에는 양국의 과거사 인식의 차이가 깔려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일본은 왜 독일처럼 사죄하지 않는지 불만입니다. 일본 사회에서는 일본이 기본적으로 사죄했는데도 한국은 거듭 사과를 요구하고, 특히 전쟁 책임이 없는 세대에게 사죄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며, 한국 측이 양국 간에 체결된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이나 2015년 한일위안부 합의에 반해 새로운 주장을 하는 것은 국제법 질서에 어긋난다고 주장합니다. 일본 측의 협정이나 합의 위반 주장은 일본 나름대로 해볼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사죄를 할 만큼 했다는 주장은 그 진정성에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속내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일본은 한국의 요구가 지나치다고 생각하더라도 참고 수용해야 하고, 한국은 도덕적 우위에 서서 품격 있게 일본에 대응해야 합니다. 1998년 10월 8일 한일 간의 우호적 파트너십을 선언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총리의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은 그 전범을 보여주었습니다.

더하여 일본이 왜 독일처럼 사죄하지 못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독일은 9개국과 국경을 직접 맞대고 있는 국가이므로 인접국과의 관계가 개선되지 않으면 국가의 운영에 심대한 지장을 받지만, 일본은 섬나라로 인접국과의 관계성이 낮은 지정학적 이유로 그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적은 국가입니다. 또한 일본은 전쟁을 일으킨 전범 가해국이지만 원자폭탄 피폭이라는 인류 최대의 비극적 피해를 겪었기에 자신들을 마치 전쟁 피해국으로 생각하는 정서가 있습니다. 독일에서도 2차 대전 종료 직전 연합국의 베를린, 드레스덴, 함부르크 등에 대한 과도한 무차별 공격으로 희생된 민간인 피해를 둘러싼 논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독일의 주류 사회는 이를 철저히 차단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역사 상대주의적 물타기는 허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독일은 잘못에 대한 회개와 용서라는 기독교적 윤리관이 지배하는 사회임에 반하여 일본은 천황 숭배의 국수주의적 신도이즘의 종교관을 갖고 있었던 나라입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일본이 독일처럼 사죄하는 데 한계가 있는 나라인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면서 문제를 풀어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튼 광복절은 과거에 분노하며 기뻐하는 날이 아니라, 미래를 다짐하며 기념하는 날이어야 합니다.

[김황식 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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