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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로비의 그림] 청량한 사랑고백부터 그윽한 대화까지···예술이 내게 속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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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대로 대신343

팝아트 巨匠 로버트 인디애나의 ‘러브’

뉴욕과 다른 色으로 뜨거운 열정 담아내

대신증권 ‘새로운 명동 시대’ 의지 표현

부르주아 ‘아이벤치’ 탐구·교류 형상화

화사하고 경쾌 해링턴 세트작품도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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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 갑자기 사랑 고백을 받은 기분. 잿빛 도시 서울을 걷다 뉴욕의 색다른 활력을 마주한 것 같은 느낌. 지하철 을지로입구역 쪽에서 을지로3가역 방향으로 걷다가 ‘대신343’ 앞에 세워진 로버트 인디애나(1928~2018)의 ‘러브(LOVE)’를 만났을 때의 들뜬 마음이다. 소중하기에 누구나 원하는 사랑, 그렇기 때문에 흔하디 흔해져버린 사랑. 흥얼거리는 노랫말부터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며 한 톤 높이는 상담원의 인사말까지 무심한 단어가 돼버린 일상 속 사랑. 인디애나의 ‘러브’도 그런 역설적 시련을 겪었다. 시카고예술대를 졸업한 실력파 작가 인디애나에게 1964년 뉴욕현대미술관(MoMA)이 크리스마스카드 제작을 의뢰했다. ‘사랑’이 떠오른 건 당연했다. ‘O’자를 얌전히 세운 게 어쩐지 재미없어 살짝 기울였다. 평범한 사랑의 짜릿한 파격이었다.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우표·티셔츠·머그잔·포스터 등 다양한 방식으로 ‘러브’가 제작됐다. 과했다. ‘사랑’은 보통명사라 저작권 등록이 되지 않았다. 작가의 허락도 구하지 않은 숱한 ‘러브’가 만들어졌고 인디애나는 상투적인 작가 취급을 받게 됐다. 그가 1978년 뉴욕을 등지고 메인주 바이널헤이븐의 섬으로 들어가버린 사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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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아트가 그렇다. 대중문화 속 흔한 이미지, 일상 용품의 별스럽지 않은 모습을 다시 보게 만드는 것. 자주 접하는, 남들도 다 가진, 그래서 나도 가져야 할 것만 같은 그것. 일상적 의미의 가치를 증폭시킨 게 팝아트다. 인디애나는 앤디 워홀과 더불어 팝아트의 대표 작가로 이름을 새겼다.

대신금융그룹은 30년 남짓한 여의도 시대를 마무리하고 2017년 1월 이곳 대신343으로 이전하면서 작품 ‘러브’의 설치를 먼저 끝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더 큰 진심을 전할 수 있는 예술의 소통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뉴욕 6번가의 랜드마크인 ‘러브’는 붉은 글씨에 안쪽이 파랗지만 삼일대로의 ‘러브’는 그 반대다. 사랑을 속삭이는 청량한 목소리, 가슴에 품은 뜨거운 열정은 이 작품이 더 정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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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343에는 대신증권 본사부터 대신자산운용·대신경제연구소 등 금융 계열사들이 입주해 있다. 1962년에 설립된 삼락증권이 중동전쟁 발발로 ‘석유파동’을 겪으며 위기에 처했고 이를 1975년 송촌 양재봉(1925~2010)이 인수해 대신증권을 출범했다. 큰 대(大), 믿을 신(信)을 쓴 대신증권 현판을 내걸고 제일 먼저 진행한 것은 기업공개였다. 증권회사 대형화 과정의 초석이었다. 업무량과 직원 수가 함께 늘며 충무로2가의 본점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당시 금융 중심지였던 명동에서도 한복판인 옛 국립극장을 매입했다. 1976년 9월 13일 포문을 연 명동 사옥 시대다. 근면성실과 친절봉사가 범국민적 구호이던 성장 주도형 산업화 시대에 사훈을 ‘정답게, 참되게, 새롭게’로 바꿀 정도로 혁신적이었던 양재봉 창업주는 증권 업계 최초로 자가 사옥을 갖게 되던 그해 전 사원을 대상으로 상징 동물에 대한 현상 모집을 진행했다. 증권 시세의 강세장을 뜻하는 황소(bull)가 선정됐다. 창사 20주년이던 날 첫 삽을 떠 1985년 6월 입주한 대신증권 여의도 본사 앞에 들어선 ‘황우(黃牛·1994)’로 이어졌다. 형태의 근원에 충실하면서도 감성적인 것으로 유명한 조각가 김행신(80)이 실제 황소를 사다 놓고 1년 가까이 관찰, 연구해 제작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한국거래소·금융투자협회의 소와 함께 ‘여의도 3대 황소상’으로 불렸다. 큰 눈과 큰 귀의 ‘황우’는 온라인 누적 거래액 1000조 원을 쌓고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넘는 그 모든 과정을 목도했다. 대신증권이 2017년 지금의 삼일대로 대신343으로 이전할 때 위례신도시 대신증권 역사관으로 옮겨갔다.

대신343의 1층 로비에 들어서면 두 개의 큰 눈을 만나게 된다. 거장 루이즈 부르주아(1911~2010)의 ‘아이벤치(Eye Benches)’다. 부르주아는 대형 거미 모양의 청동 조각 ‘마망’으로 유명하다. 거미는 자식을 위해 제 몸까지 먹이로 내어주는 무한의 모성애를 상징한다. 또 다른 대표작인 ‘아이벤치’는 세상을 인식하고 탐구하는 눈(目)이자 세상과 교류하는 눈을 거대하게 형상화했다. 깊은 눈주름이 그윽한 부르주아의 두 눈이 방문객을 지긋이 바라본다. 감시하는 눈은 위에 있지만 동경하는 눈은 아래에서 올려다본다. 응시하는 눈은 상대의 시선과 높이를 맞춘다. 아이벤치는 섰을 때 가슴보다 아래쯤 놓이는 올려다보는 눈, 걸터앉으면 그 눈동자 속에 빠져들고 마는 ‘맞추는 눈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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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 안쪽 끝에는 검은 ‘아이벤치’와 색상적 균형감을 맞추려는 듯 현란한 작품이 기다리고 있다. 2028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의 로고 디자이너로 선정된 미국 작가 스티븐 해링턴(43)의 작품이다. LA의 찬란한 햇살을 받고 자라 밝은 색감과 소통 능력이 강점인 작가다. 나비넥타이에 선글라스를 쓴 2.75m의 동물 조각 ‘잠재의식(Subconscious)’, 그 옆구리에 낀 작은 그림과 똑같은 평면 회화 ‘혼란(Disarray)’이 세트를 이룬다. 물감이 뚝뚝 떨어지는 커다란 붓을 손에 들고 자신이 화가임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일을 즐기며 만끽하자고 청한다.

사실 이 건물의 실제 로비 기능을 담당하는 공간은 5층이다. 지하 주차장에서든 1층에서든 엘리베이터로 연결된다. 미술관인지, 도서관인지, 고급 카페인지 어리둥절할 지경인 ‘독특한’ 공간이다. 층고가 유난히 높은데 전면 통유리로 밖을 내다볼 수 있게 해 숨통을 열어준다. 바로 앞 명동성당을 정면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혜택이다. 현대카드의 제1호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유명한, 대신증권으로 옮겨와 브랜드전략실을 이끌고 있는 김봉찬 이사가 공간 디자인 전체를 총괄했다. 기업의 외부 고객도 중요하지만 5층의 도서관 겸 카페 공간은 내부 고객을 고려했다. 임직원의 자기 계발을 위한 다양한 책이 동선에 따라 손 닿기 좋게 꽂혀 있고 어디서든 앉아 읽을 수 있는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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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띄는 것은 도서관 안쪽에 푹 안긴 작은 갤러리다. 복도 하나를 아늑한 전시장으로 만든 셈이다. 지금은 20세기 추상미술의 거장인 독일 작가 한스 아르퉁, 프랑스 화가 마크 데그랑샹, 한국의 미술가 오세열·안석준의 그림을 만날 수 있다. 아르퉁의 노랑·파랑 추상화가 오세열의 검은 낙서 그림과 대화 하고 데그랑샹의 도시 인물화가 안석준의 산수 풍경과 교차한다. 대신343의 로비 그림들은 그렇게 소곤소곤, 말로 다 적을 수 없는 깊은 이야기들을 속삭인다.

글·사진=조상인 미술전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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