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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암호화폐라는 신 앞에서 ‘숫자’가 된 청춘[책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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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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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신은 얼마

하승민 지음 | 안전가옥 | 230쪽 | 1만원 

스물아홉 살 청년 이정환은 “시장 골목에 딸린 치킨 가게”에서 일한다. 하루 대략 50마리의 닭을 튀긴다. “언젠가 찬란한 미래에 도달”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아르바이트를 마치면 시장 분석, 경제 공부에 시간을 할애한다. 부자 되는 법, 주식 하는 법, 부동산 투자하는 법, 경매하는 법 같은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는다.

고등학교 동기 송현기가 어느 날 박정배라는 사람을 납치해주면 암호화폐에 투자한 돈 절반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송현기는 절도죄와 주거침입죄로 2년 감옥에서 살다 출소했다. 고급 빌라에서 2000만원가량의 금품을 훔쳐 탕진하고 마지막 남은 500만원을 이정환 도움을 받아 래더코인에 투자했다. 그 빌라에서 “돈 냄새가 희미하게 풍기”는 듯해서 훔친 것 중 하나가 ‘래더코인 ICO 전략’이라는 문서였다.

래더코인은 치과의사를 하다 전업 투자자로 나선 ‘최닥(최doc)’이 돈을 대 만든 암호화폐다. 송현기가 턴 빌라 중 하나가 최닥의 집이었다. 암호화폐 거래소에서 일하는 ‘양 이사’가 “대한민국에 규제가 없는 도박 시장이 열렸다”며 아이디어를 낸다. 최닥은 일간지 경제부 기자 ‘박프로’, 로펌 변호사 ‘유변’과 정보를 주고받으며 작업을 구체화한다.

싱가포르에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펀드 운용 회사를 만들었다. 거래소에 물량 리포트를 보고하기 전 차명 계좌 수십개를 확보해 코인을 쪼개 담았다. 소수의 사람이 코인을 독점한다는 걸 숨기려는 작업이었다. “래더코인이 뜬다더라. 유명 스타트업 대표들이 투자했다더라” 같은 말들을 투자 커뮤니티 대화방에 흘렸다.

암호화폐 열풍을 타고 500만원에 사들인 래더코인은 5억126만940원까지 오른다. 1만102.3%의 투자수익률을 낸 것이다. 이 돈 앞에서 이정환은 흔들린다. 박정배를 납치하면 송현기가 죽일 것이다. 이정환은 “(납치로) 내가 버는 돈의 무게만큼 누군가는 살덩어리를 내놓아야 하는 것”을 두고 고민한다. 법원의 천칭을 떠올리며 “저울에 올라가는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저울을 들고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이걸 모르는 사람들은 실패한다. 철근에 깔려 유명을 달리한 노동자, 과로로 사망한 회사원은 ‘사소한 부주의’나 ‘관리자의 일탈’ 같은 표현으로 포장돼 기억에서 지워지기 마련”이라고 생각하며 납치 제안을 수락한다. “내가 나쁜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사회가 잘못됐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라고 자신을 설득한다. 치킨 조각들을 빼돌려 한 마리를 만들어 챙기던 소소한 절도가 납치와 살인이라는 극악한 범죄 모의까지 이어진 것이다.

우리는 숫자였다. 그래프 위의 작은 점에 지나지 않았다 … 지우거나 밟아도 티 나지 않는 이음새였고 실업률과 취업률, 출산율로 존재하는 통계였다
- <당신의 신은 얼마> 중


소설의 큰 줄기는 암호화폐 광풍과 이면의 조작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보는 것이다. 양 이사가 최닥에게 한 말은 “법을 어기지 않고서도 다른 사람의 돈을 빨아먹을 방법”이었다. 안전지대에서 “지뢰밭을 기어 다니는 인생들을 멀리서 지켜보”는 존재인 최닥은 작업과 조작을 두고 ‘누가 타인에게 피해를 줄 준비를 더 과감하게 했느냐의 문제’로 여길 뿐이다. 최닥은 ‘죄책감’ 여부를 묻는 질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인걸요. 숫자 뒤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아요. 숫자에는 표정이 없어요”라고 말한다. 최닥은 “암호화폐 투자는 청년 세대 표심에 영향을 미치는 주제”로 여긴 야당 대선 후보와 만난 자리에서 이런 대사와 방백을 쏟아낸다.

개미 투자자인 이정환도 “죄책감을 다루는 뇌의 어느 부분이 망가졌을 것”이라고 여긴다. 죄의식은 투자 커뮤니티를 드나들며 무뎌진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기꺼이 타인을 조롱했다. 사람들과 함께 진영을 이루어 상대편을 욕하고 있으면 스스로가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사회적 약자에게는 노력하지 않았다는 프레임을 씌웠고 강자는 위선적이라는 이유로 비난했다.” 이정환은 “윤리와 규범의 경계가 무너져도 괜찮은 공간”에서 자유로워졌다. 이정환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계층 사다리 걷어차기, 부동산값 폭등, 병역 특혜 등 한국 사회의 여러 사안을 두고 이른바 ‘이대남’의 보편적 인식, 좌절과 분노를 드러낸다. 편의점 계산대의 노인 계산원을 두곤 “나이로 사람을 차별하고 싶지는 않다”면서도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는 외국인이나 인지능력 떨어지는 노인이 카운터를 보는 건 효율성을 낮추는 일”이라고 본다.

작가 하승민은 여러 오해를 우려한 듯 ‘작가의 말’에서 “이 이야기의 어떤 부분이 제 의도와 상관없이 누군가를 공격하게 될 수도 있겠지요. 다만 어떤 선한 지대에 우리 모두가 닿기를,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원했음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특정 대상이나 집단을, 차이를 이유로 차별하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바랍니다. 약자의 연대와 투쟁을 응원하고 지지합니다”라고 적었다.

기자와 통화하며 이정환이 이대남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다만 이해를 하자는 것이다. (소설의 주안점은) 투기 광풍 상황을 냉정하게 진단하자는 것”이라고 했다. 소설 주제와 작가의 문제의식은 숫자에 관한 서술에서 여러 차례 변주되며 나타난다. 목차는 ‘1.233.1%=11,567,520’처럼 투자수익률과 코인 가격으로 이어진다. 도입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숫자였다. 그래프 위의 작은 점에 지나지 않았다 … 지우거나 밟아도 티 나지 않는 이음새였고 실업률과 취업률, 출산율로 존재하는 통계였다.” 숫자는 이정환에겐 신이었다. “(이 신이) 번영을 가져다줄 것을, 나의 신념을 알고 나를 위로할 것”이라 믿었다. 한편 “절망의 메시지 앞에서 몰락하는 숫자”였다.

이정환이 “죽어라 일해야 갚을 수 있을 정도의 이자를 책정”해 빌려주는 대출금을 두고 결론처럼 내뱉은 말은 다음과 같다. “이 사회에서 신과 악마는 모두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둘은 숫자의 형상으로 이 땅에 현신한다.”

경향신문

하승민 작가 | 안전가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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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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