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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만물상] 반지하 집 소녀의 마지막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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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하성란의 단편 ‘카레 온 더 보더’는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다. ‘방에는 해가 들지 않았다.(중략) 지하방은 지상에서 고작 열 계단 아래였다. 그런데도 그녀가 상상할 수 없는 어둠이 펼쳐졌다.’ 2020년 기준 전국 32만 가구가 지하나 반지하에 산다. 90%가 수도권에 몰려 있고, 서울 가구 중엔 백에 여섯이 반지하다. 그곳에 깃든 어둠을 볕 좋은 집에 사는 이들은 상상하기 어렵다고 소설은 쓴다. 소설 주인공은 집안 가득한 곰팡내를 지우기 위해 카레를 끓인다. 누가 냄새 없애려 카레를 끓인다고 상상하겠나.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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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하·옥탑방·고시원을 합해 ‘지옥고’라 한다. 한국의 열악한 주거 환경을 상징하는 어휘다. 그중에도 반지하는 최악으로 꼽힌다.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기택네 반지하의 벽지는 곰팡이와 물때로 얼룩져 있다. 밖에서 안이 들여다보이고 도로의 매연과 소음, 노상 방뇨 악취가 들어오기 때문에 창문은 닫아 둔다. 습하고 환기가 안 되니 벌레도 꼬인다. 요즘은 반지하라도 깨끗한 집이 많다. 하지만 본질적인 열악함은 피하기 어렵다.

▶반지하살이 최악의 고역은 침수 피해다. 계단을 타고 내려와 집안을 물바다로 만든다. 화장실에선 오수가 역류한다. ‘기생충’의 기택네 식구들은 소독차가 동네에 나타나면 창문을 닫지 않고 활짝 연다. 해충에 시달리느니 잠시 소독 가스 참기를 택한 것이다. 그렇게 버텼지만 홍수로 물이 목까지 들어차자 세간도 건지지 못하고 탈출한다. 외신은 이번 물난리를 보도하며 ‘banjiha’(반지하)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naeronambul(내로남불)에 이어 씁쓸한 한국 단어가 하나가 더해졌다.

▶8일 밤 집중호우가 서울 신림동 반지하 주택을 덮쳐 40대 엄마와 초등학교 6학년 딸, 장애를 앓던 엄마의 언니가 목숨을 잃었다. 사고 4시간여 전, 병원에 입원한 할머니에게 보낸 아이의 문자가 알려지며 많은 이가 눈물을 쏟았다. ‘할미 병원에서 산책이라두 하시면서 밥도 드시고 건강 챙기시구요. 기도도 많이 했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편안하게 계셔요.’

▶기도한다는 건, 꿈이 있다는 뜻이다. 아이는 모아 쥔 두 손으로 할머니의 건강한 귀가를 기도했다. 장차 훌륭한 어른으로 자라는 미래도 꿈꿨을 것이다. 엄마도 한 달 전 언니 침대와 아이 책상을 새로 장만했다. 가족의 행복한 앞날을 소망했다는 뜻이다. 그날 불행을 당한 이들이 있던 자리가 내 자리였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꿈을 피우지 못하고 시든 이 가족의 비극이 더 반복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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