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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인생+] 정정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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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크루즈가 <탑건>의 속편을 내놓는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과연 그 배우답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무리 기량이 출중하다 해도 환갑의 나이는 어쩔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니 ‘세월 앞에는 장사 없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외모가 건장했다. 그의 기세등등한 몸짓은 한 세대 아래의 젊은 배우들을 압도했고, 발랄하면서도 육중한 스태미나가 스크린을 꽉 채우면서 분위기를 장악했다. 동갑내기 남자로서 위화감을 느끼게 하는 카리스마였다.

경향신문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


영화 관람 후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전편에서 톰 크루즈의 라이벌 역할을 맡았던 발 킬머가 깜짝 출연한 장면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그는 발성이 어려워 타이핑을 쳐서 의사를 전달했고, 잠깐 목소리를 내는 대목도 예전의 음성들을 모아다가 AI로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5년 전에 후두암 진단과 기관절개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패기 왕성한 동료 배우 앞에서 병약해진 육신이 극명하게 대비되는데도, 그는 기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담담한 표정은 톰 크루즈의 위세보다 더욱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나이가 들어도 굳세고 건강한 사람들을 가리켜 ‘정정하다’고 한다. 한자를 찾아보면 ‘亭亭’으로서, 정자(亭子)를 가리키는 말이다. ‘장정(壯丁)’이라는 단어에 들어간 정, 즉 ‘젊은 남자’ ‘왕성하고 씩씩함’ 등을 뜻하는 정(丁)자일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의외의 표현이다. ‘정정하다’는 말에는 ‘나무나 바위가 높이 솟아 우뚝하다’는 뜻도 있어서 정정함의 심오한 본질을 가늠하게 해준다. 그러니까 정정함이란 단지 몸이 튼튼하고 기운이 팔팔한 것이 아니다. 정자처럼 사방으로 시야가 열려 있고, 안이 넉넉하게 비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은은한 정기로 기품을 세우고 있어야 한다.

절벽, 계곡, 연못, 마당 등 다양한 곳에 서 있는 정자의 매력은 무엇인가. 박언곤 박사는 <한국의 정자>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런 정자 안에 앉아 있으면 (…) 대자연 속에 동화되고 만다. 때로는 물과 함께 억겁의 세월 속에서 함께 흐르기도 하고 때로는 광활한 허공에서 거침없이 시공을 초월하기도 한다. 그래서 인공의 구조물인 이런 정자가 결코 자연 속에서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거기 있는 바위, 거기 있는 소나무처럼 그저 자연스럽기만 하다.’

젊음과 건강을 떠받드는 세상에서 나이 듦은 서글픈 일로 체감된다. 그래서 ‘안티 에이징’이라는 구호가 남발되는데, 자본주의 체제가 자아내는 집착일 뿐이다. 톰 크루즈도 머지않아 발 킬머와 비슷한 처지가 될 수밖에 없다. 노익장에 대한 환상, 그 덧없는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삶의 무상함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노년이 되고 싶다. 문명 속에 살면서도 자연의 순리에 편안하게 복종하는 지혜를 터득하고 싶다.

자주 거니는 숲길에 단아하게 서 있는 정자가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세월과 함께 흐르면서도 거침없이 시공을 초월’하는 기세가 어렴풋이 느껴진다. 정정하게 산다는 것은 그러한 내공을 닦으면서 인생을 조망하는 여유가 아닐까. 우주의 질서에 자신을 맡기면서 삶을 노래하는 풍류가 거기에 있다. 이 여름, 나무 그늘의 정자에 잠시 걸터앉아 선경(仙境) 한 자락을 음미해야겠다.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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