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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규제완화? 아니고요, 오히려 대기업 규제강화”… ‘우회전 신호 켜고 좌회전’ 한 공정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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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비즈

윤수현 공정거래위원회 부위원장이 10일 오전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동일인의 친족 범위 조정 등을 담은 공정거래법 시행령 개정안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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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거래위원회가 대기업 총수(동일인)의 친족 범위를 혈족·인척은 축소하되, ‘사실혼 배우자’를 추가한 것을 두고 ‘우회전 깜박이를 켜고 좌회전을 한 격’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공정위는 10일 대기업의 공시 의무 대상인 동일인 친족 범위가 국민 인식 대비 넓게 설정돼 있어 기업에 과도한 부담을 준다면서 혈족 6촌은 4촌으로, 인척 4촌은 3촌으로 축소하는 내용의 공정거래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동일인 친족 범위 축소는 현 정부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부터 밝혀 온 기업 부담 완화 정책 중 하나다. 인수위는 정부 출범 전 국정과제를 통해 합리적인 규율로 기업 부담을 덜어주겠다면서 대기업 집단의 동일인 친족 범위 축소 계획을 밝힌 바 있다.

공정위는 현행 동일인의 친족 범위에 대해 “국민 인식에 비해 범위가 넓고, 핵가족 보편화와 호주제 폐지 등으로 이들을 모두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다”면서 “기업 집단의 수범 의무가 과도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며 정부 방침에 보조를 맞췄다. 친족 범위 축소로 현재 총수가 있는 60개 대기업 집단의 친족수는 8938명에서 4515명으로 절반 가까이 줄어들게 된다.

공정위는 이와 함께 사외이사 영입시 해당 사외이사가 지배하는 회사도 대기업 집단에 자동 편입됐던 것도 개정해 계열회사 범위에서 제외하도록 했다. 현행 제도는 사외이사가 독립적으로 경영하는 회사에 대해서는 임원독립경영 신청을 통해 사후적으로 계열회사에서 제외하는 ‘옵트 아웃(opt-out)’ 방식을 적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방식이 기업 집단에 과도한 수범 의무를 부과하고, 대기업 집단 규제 적용에 따른 부담으로 전문성 있는 사외이사 섭외를 어렵게 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에 공정위는 사외이사가 지배하는 회사가 임원독립경영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경우에만 대기업 집단 계열회사로 편입하도록 하는 ‘옵트 인(opt-in) 방식을 채택하기로 했다.

대기업이 투자한 중소·벤처기업이 대기업 집단 편입을 유예할 수 있는 요건도 완화했다. 그동안 중소기업은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R&D)비 비중이 5% 이상인 경우에만 계열 편입이 유예됐으나, 개정안은 이를 ‘3% 이상’으로 완화했다. 공정위에 따르면 매출액 대비 R&D 비중이 5% 이상인 중소기업은 약 39만개, 3% 이상인 중소기업은 54만개로, 적용대상 중소기업은 15만개 증가하게 된다.

규제를 풀기만 한 것은 아니다. 공정위는 동일인의 친족 범위에 친생자가 있는 사실혼 배우자를 포함시켰다. “사실혼 배우자가 계열회사의 주요 주주로서 동일인의 지배력을 보조하고 있는 경우에도, 공정거래법 상 특수관계인에서 제외되는 규제 사각지대가 있다”는 게 공정위의 설명이다.

공정위 내에서는 이번 동일인 친족 범위에 사실혼 배우자가 포함된 배경으로 SM(삼라마이더스)그룹과 롯데그룹의 사례를 고려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우오현 SM(삼라마이더스) 그룹 회장과 사실혼 관계인 김혜란 씨는 SM그룹의 2대 주주에 해당하지만 그동안 사실혼 배우자가 친족 범위에 포함되지 않아 동일인 관계자로서 신고 의무가 부과되지 않았다. 우 회장과의 사실혼 관계라는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기 전까지 SM그룹에서 김씨는 쉬쉬하는 대상이었다. 우 회장 입장에선 김씨가 SM그룹에 대한 지배력을 확고하게 해주는 은밀한 우군이었다.

또 故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과 사실혼 관계였던 서미경 씨가 최대 주주로 있는 개인회사가 롯데그룹의 계열사의 일감 몰아주기로 특혜를 받아 사익을 편취한다는 지적이 제기됐지만, 사실혼 배우자에 대해선 동일인 관계자 규제가 적용되지 않아 처벌을 피하기도 했다. 다만 현재 롯데그룹의 동일인은 신 명예회장의 차남인 신동빈 회장인 관계로, 서씨는 이번 시행령 개정으로 인한 친족 범위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이번 조치로 인해 그동안 대기업 총수와 사실혼 관계에 있던 사람들도 기업 집단 규제의 사정권 안에 들어오게 됐다. 이들이 소유한 법인도 대기업 집단 계열로 간주돼 소유 지배 구조 등에 대한 신고 의무를 갖게 됐다. 또 이들이 소유한 법인과 대기업 집단에 속한 계열 기업 사이의 거래도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적용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총수와 사실혼 관계에 있는 배우자를 친족 관계로 지정하는 게 비현실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현재의 가족제도를 고려했을 때, 총수의 사실혼 배우자를 친족 관계로 공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태원 SK그룹 회장처럼 본인이 먼저 사실혼 관계와 친생자의 존재를 알리지 않는 이상 기업에선 파악할 방도가 없다. 한 재계 관계자는 “친생자 유무라는 조건을 사실혼 배우자의 조건으로 넣긴 했지만, 이러한 부분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라면서 “공정위로선 총수 일가의 지배력 남용을 예방하기 위한 사전적 규제로 도입했겠지만, 사적 영역에 대한 과도한 개입이 될 소지가 크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윤수현 공정위 부위원장은 “이번 시행령 개정안은 규제를 축소하는 게 대부분이지만, 예외적으로 사실혼 배우자를 친족에 포함하는 것은 규제 확대 측면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면서도 “경제력 집중 억제와 사익편취 방지를 위해 기업 총수에게 친생자가 있는 사실혼 배우자 신고할 의무를 부여한 것이다. 고의적으로 누락할 경우 형사 제재까지 부과할 수 있다”고 했다.

윤희훈 기자(yhh22@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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