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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특파원 칼럼] 펠로시가 열어준 ‘기회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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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주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이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은 일정이 공개되지 않은 채 비밀 작전처럼 이뤄졌다. 방문 계획이 알려진 후 중국이 거세게 반발했기 때문이다. 미·중관계 악화와 대만해협의 긴장 고조를 우려해 미국 정부도 만류했지만 그는 결국 미국 내 권력서열 3위의 하원의장으로서는 25년 만에 처음 대만 땅을 밟았다.

경향신문

이종섭 베이징 특파원


중국은 이를 ‘하나의 중국’ 원칙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리더십에도 상처를 남겼다. 중국은 펠로시 의장이 탄 비행기를 격추하거나 대만 착륙을 방해하기라도 할 것처럼 으름장을 놨지만 결국 그의 대만행을 막지 못했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중국 누리꾼들은 ‘능력이 없으면 힘을 과시하지 말라’며 당국의 대응에 실망감을 표했다.

펠로시 의장의 대만행은 의도치 않게 중국에 기회의 창을 열어준 측면도 있다. 중국은 그가 대만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대만을 포위하는 대대적인 군사훈련을 예고하고 실행에 옮겼다. 중국 관영매체는 이를 ‘통일 작전 리허설’로 규정했다. 그동안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준비해온 무력통일 시나리오를 실제 훈련에 접목해볼 수 있는 빌미가 주어진 셈이다. 군 현대화와 군사력 증강의 성과를 과시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시 주석으로서도 체면을 구기긴 했지만 손해 볼 게 없는 장사다. 그는 대만 통일을 자신이 완성해야 할 마지막 퍼즐로 인식한다. 3연임을 앞둔 그에게는 통일에 대한 열망을 자극하면서 자신의 장기집권 명분을 강화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장기화된 ‘제로(0) 코로나’ 정책과 경기 침체 등으로 악화된 민심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부수적 효과도 있다.

반면 미국이나 대만이 얻은 실익은 많지 않아 보인다. 미국은 더욱 악화된 중국과의 관계를 관리해야 할 숙제를 떠안게 됐다. 대만은 미국의 지지를 재확인하는 대신 고조되는 중국의 군사적 위협과 경제 보복 같은 후폭풍을 모두 감내해야 할 처지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순전히 상징적일 뿐인 방문의 결과로 대만이 더 안전해지거나 번영하지는 않으며 미국은 중국, 러시아와의 동시 갈등에 빠질 수 있다”면서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이 “무모하고 위험하며 무책임하다”고 지적했다.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도 대만해협의 위기와 미·중 갈등이 고조되면 그 불똥을 피해가기 어렵다. 당장 미국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방한한 펠로시 의장을 직접 만나지 않은 것을 두고 “미국을 모욕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미·중관계가 악화될수록 두 강대국 사이에 낀 주변국들의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중국도 현 상황을 마냥 ‘꽃놀이패’로 바라볼 건 아니다. 당장은 대만을 압박하고 무력을 과시할 수 있는 호기를 잡았다고 판단할지 모르지만 그런 행동이 계속될수록 미국과 동맹국은 중국에 대한 억제력을 강화하려 할 것이다. 또 계속된 군사행동은 국제사회에서 점점 중국을 고립시키는 역풍을 불러올 수 있다. 더 이상의 폭주는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다. 중국도 ‘출구전략’을 고민해야 한다.

이종섭 베이징 특파원 noma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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