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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모神父 탈출시킨 주역은 정약용… 천주교, 역사 속 파묻힌 거대한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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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의 신간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서 주장

조선일보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를 쓴 정민 교수는“천주교 관련 문헌인‘송담유록’‘눌암기략’등의 번역과 주석 작업도 이미 마무리한 상태”라고 말했다. /남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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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5년(정조 19년), 천주교는 전래됐으나 아직 신부가 없던 조선에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입국했다. 그가 신도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고 고해성사를 한 곳은 임금이 있는 창덕궁에서 1㎞ 남짓 떨어진 계산동(지금의 계동)이었다. 그러나 한영익이란 사람이 밀고했고, 영의정 채제공은 즉시 정조 임금에게 이를 보고했다.

포도대장이 계산동 집을 덮쳤을 때 주 신부의 자취는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누군가 밀고 사실을 듣고 황급히 계산동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과연 누구였을까? 정민(61) 한양대 국문과 교수는 뜻밖의 자료에서 단서를 찾아냈다. 1797년 베이징의 고베야 주교가 쓰촨의 디디에 주교에게 보낸 라틴어 편지에 “한때 신자였다가 배교했던 무관 한 사람이 주 신부에게 와서 피하라고 알려 줬다”고 썼던 것. 배교자였으면서 한영익이 밀고할 때 그 자리에서 같이 내용을 들었고, 당시에 잠시 무관직으로 궁궐에 머물고 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다산 정약용이었다.

고전학자로서 조선 지성사를 탐구하던 정민 교수가 18세기 말 조선의 천주교사(史)를 깊숙하게 다룬 900쪽 분량 연구서 ‘서학(西學), 조선을 관통하다’(김영사)를 냈다. “강진 유배 시절의 다산을 연구하다가 젊은 시절의 저작을 뒤져봤더니 천주교를 빼놓고는 설명이 안 되더라고요.”

좀 더 깊이 연구를 해 보니 동시대 다른 학자들의 사고 체계 속에서도 천주교의 영향은 대단히 컸다. 그러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기록에서 검열·삭제하거나 족보에서 이름이 사라지는 등 많은 부분이 은폐돼 있었다. 정 교수는 “이번 책 곳곳에 뜨거운 감자가 있다”고 했다. 강세정의 ‘송담유록’과 이재기의 ‘눌암기략’ 등 학계에서도 생소한 자료들을 교차 검증해 퍼즐 맞추듯 실상을 복원했다. 고증을 통해, 첫 천주교인 이승훈의 책으로 알려져 70년 동안 성전(聖典)으로 대접 받았던 ‘만천유고’가 후대의 위작이었다는 주장도 했다.

정 교수는 최근 “순교자 윤지충의 무덤 지석(誌石)의 글씨는 다산이 쓴 것”이라고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다산이 ‘조상 제사를 거부할 수 없다’며 배교한 뒤에도 사실 신앙을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들로 인해 그는 국학과 천주교 양쪽에서 공격을 받아야 했다.

그는 “조선 후기의 역사에서 천주교는 거대한 지진으로 덮인 폼페이 유적이었다”고 설명했다. ‘양반과 종이 절대자 앞에서 평등한 존재’라는 사상은 도덕과 윤리, 신분제도, 왕조의 시스템 자체를 뿌리부터 뒤집는 것이었다는 얘기다. 그뿐만 아니라 정조 때 모처럼 권력을 잡은 남인 세력을 신서파(信西派·천주교에 호의적인 세력)와 공서파(攻西派·천주교를 공격한 세력)로 양분시켜 커다란 정치적 파장까지 초래했다.

정 교수가 말했다. “큰 지진이 일어난 자리에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고 해서 지진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조선 지성의 흐름상 성리학이 양명학(지행합일을 주창한 유교 철학)으로 갔다가 서학까지 나아간 게 아니라, 성리학이 서학과 만나 충돌했기 때문에 양명학이 완충 역할을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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