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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충분히 살릴 수 있었는데…” 반지하 가족의 비극, 이웃들은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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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9일 오후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반지하 주택이 빗물로 가득한 모습이다. 지난 8일 서울에 내린 폭우로 해당 빌라 반지하에 물이 지붕까지 차오르면서 이곳에 살고 있던 40대 자매와 10대 딸 일가족 3명이 목숨을 잃었다. 2022. 8. 9 / 장련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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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서울에 쏟아진 집중호우로 관악구 신림동의 한 다세대주택 건물의 반지하층에서 살던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와 그의 어머니, 함께 살던 이모가 물에 잠긴 집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숨졌다. 어린이의 이모는 다운증후군을 앓는 장애인이었다. 또 동작구 상도동에서도 반지하에 살던 50대 여성이 자기가 살던 반지하 방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다. 서울을 덮친 이번 폭우는 이렇게 비싼 전·월세 비용을 부담하기 힘들어 반지하나 집 천장이 허술하기 일쑤인 달동네에 살던 취약 계층에 특히 더 가혹했다.

신림동 건물 반지하의 약 66㎡(20평) 안팎 집에는 네 사람이 살고 있었다. 12세인 초등학생 A양과 그의 어머니(46)와 이모(47), 그리고 할머니였다. A양의 어머니는 이혼한 후 아이와 장애인인 언니, 그리고 70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아이의 할머니는 사고 당시 건강이 나빠 동작구 한 병원에 검사를 받으러 입원한 상태라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들이 살던 이 주변에는 반지하방을 둔 건물이 밀집해 있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웃들은 “충분히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서 이들의 죽음을 특히 더 안타까워했다.

소방과 경찰, 이웃들에 따르면 비가 퍼붓던 지난 8일 오후 8시 전후로 이 일대에 갑자기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A양의 어머니가 자기 집 밖에 물이 차오르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집 안에서 문을 열 수 없던 상황이었다. 복도에 물이 가득 찬 탓이었다. A양 가족은 소방과 경찰에 전화를 계속 걸었지만 당시 폭우로 통화량이 많아 연결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주변 이웃들에게도 연락해 “도와달라”고 했고, 오후 9시쯤 누군가 경찰과 연락이 닿았다고 한다. 경찰과 소방차 1대가 9시 30~40분쯤 현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미 건물 주변에 물에 잠겨 이 건물로 접근이 어려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본격적으로 작업이 시작된 것은 오후 11시가 넘어서였다. 하지만 9일 0시 26분에 세 사람은 숨진 채로 발견됐다.

가족과 평소 알고 지내던 이웃들은 사고 당시 힘을 합쳐 적극적으로 구조 시도를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인근 주민 윤훈덕(35)씨는 “출입구엔 빗물이 가득 차 접근할 수조차 없어, 바로 집으로 달려가 망치를 들고 나와 창문 유리를 깨려고 했지만 실패했다”고 했다. 전예성(52)씨는 “유리가 도저히 깨지지 않자 윤씨와 함께 쇠창살이 쳐진 반대편 창문으로 가 온 힘을 다해 창살을 떼어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고 했다.

이날 낮 찾아간 관악구 은천동·봉천동·신사동 일대에서도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8일 밤에 반지하 단칸방과 복도에 빗물이 들어차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이 그대로 재현된 현장이 수두룩했다. 관악구 행운동 반지하 빌라에 거주하는 대학생 이모(21)씨는 8일 저녁 헤드폰을 낀 채 컴퓨터로 일하다 집 안에 물이 새는 것을 늦게 알아차려 피해를 봤다. 그는 한 대학교 사진학과 학생이라 수업을 듣기 위해 몇 달간 아르바이트를 하고 부모님께 돈을 빌려 카메라, 렌즈, 노트북컴퓨터 등을 마련했는데 이번에 모두 물에 잠겼다고 했다. 관악구 신사동의 한 건물 반지하에 사는 거주하는 홍모(27)씨도 “바로 옆집에는 뇌졸중을 앓는 할아버지가 사시는데, 문을 제때 열지 못해 고립될 뻔했지만 나와 이웃들이 도와 겨우 대피할 수 있었다”고 했다. 윤명오 서울시립대 소방방재공학과 교수는 “반지하는 구조상 물이 가장 먼저, 빠르게 들어오는 곳인데, 갑자기 물이 들이닥치면 수압 때문에 방문을 열기 어려워 수해 사고 때 가장 취약한 공간”이라고 했다.

서대문구에서 취약 계층이 많이 모여 사는 것으로 알려진 홍제동 ‘개미마을’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이날 마을 입구로 들어서자 콘크리트 벽돌 담벼락이 무너져 있거나, 텃밭의 농작물이 흙더미와 함께 쓰러져있는 모습이 곳곳에 보였다. 남편과 함께 이 마을에서 10년째 산다는 정옥주(81)씨의 안방은 비가 새는 바람에 천장이 바닥 쪽으로 30cm 이상 내려앉은 모습이었다. 천장 안쪽에 있던 붉은 녹이 물과 섞여 집 안으로 떨어지면서 방 안에 있던 수건이나 속옷 등 빨래가 녹물에 젖어 온통 붉게 물들었다. 정씨는 “독립유공자인 남편이 받는 지원금 110만원이 한 달 생활비 전부인데, 천장 수리비로 수십만원 들이는 건 엄두도 못 낸다”고 했다.

[박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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